몬순을 쫓아서 (Chasing Mons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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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순을 사진에 담아보겠다고 작년 이맘 때도 두달이나 인도와 네팔을 쏘다녔지만 변변한 취재를 하지 못했었다. 몬순 때만 되면 그렇게 세게 내리던 비가 본격적으로 몬순을 찍겠다고 나서자 부슬비만 한달 내내 뿌려대는 것이었다. 결국 취재를 포기하고 네팔 카트만두의 필그림 서점에 들렀다가 ‘몬순을 쫓아서(Chasing Monsoon)'라는 문고판 책만 한 권 구입했었다.

전에는 몬순 시즌에 인도를 갈 일이 생기면 걱정부터 앞섰다. 내가 주로 사용하는 필름이 감도 50짜리 후지 벨비아인데 이런 저감도 필름으로는 몬순 계절의 우중충한 날씨에 사진을 촬영한다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다. 망원렌즈를 사용하려면 셔터 스피드가 안 나와서 할 수 없이 트라이포드를 들고 다녀야 한다.

그런데 이제 기술의 발달로 카메라 감도를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게 됐으니 얼마나 편해졌는지. 몬순 아니라 몬순 할애비라도 두렵지가 않게 된 것이다.

몬순에 관심이 생기게 된 것은 오래전 취송류라는 해류에 관한 글을 읽고 나서부터다. 인도양의 해류는 인도양 상공을 부는 계절풍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고 그로 인해 여름철 몬순이라는 장마가 생긴다. 그리고 그 몬순은 동남아시아에서의 인류의 이동, 벼농사 발견 등 인간 생활 전반에 걸쳐 실로 엄청난 영향을 끼쳐 왔다.

2주 전 강운구 선생님과 점심식사를 하다가 이번에 인도에 가면 전부터 다뤄보고 싶던 몬순을 취재하려 한다고 했더니 이름을 잘 모르는 뉴질랜드 사진가 얘기를 꺼내셨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브라이언 브레이크(Brian Brake)라는 사람인데, 그의 사진을 보면 몬순 사진의 결정판이라는 생각이 들어”

“스티브 매커리도 몬순 사진집 냈었잖아요? 폭포 앞에서 우산 들고 있는 사람과 물에 잠긴 캘커타 시내에서 재봉틀 머리에 이고 가는 사람, 소나기를 맞으며 택시 유리창에 얼굴을 댄 사람 사진....”

“아냐, 브라이언 브레이크가 한 수 위야. 60년대에 인도 몬순을 촬영했는데, 당시 세계의 유수한 잡지가 대부분 그의 기사를 실었어. 같은 사진을 가지고 그렇게 많은 매체가 동시에 출판을 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일거야.”

처음 들어보는 이름. 뉴질랜드 사진가 브라이언 브레이크를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고서야 바로 그가 저 유명한 사진을 찍은 주인공이라는 것을 알았다. 기쁨으로 충만한 채 눈을 감고 몬순 소나기를 맞는 한 인도 여인의 포트레이트. 그 사진이 촬영된게 벌써 40년이 넘었나? 정말 몰랐네.

지난주엔 사진가 여동완이 내 작업실을 찾았는데, 긴 장화 차림이었다. 장화 신고 라이카 M8을 목에 멘 모습이 잘 어울린다.

“몬순 책 내려고 성북동에서 촬영하다 왔어요”

과연 부지런한 여동완답다. 그는 언제나 새로운 출판 아이템을 찾아 활동적으로 움직인다. 비가 내린다고 장화 갈아신고 성북동 길상사로 뛰어갔던 것이다.

방콕 호텔방에서 새로 구입한 카메라를 세팅하던 중 갑자기 밖에 스콜이 쏟아져 내렸다.

'자, 그럼 나도 이제 본격적으로 몬순 좀 찍어볼까.'

후다닥 택시를 타고 시내로 나가는데 퇴근 정체에 차가 서 있는 사이에 비가 뚝 그쳐버렸다.

몬순 쫓던 개, 하늘 쳐다보고.

Take it easy! 이제부터 시작인데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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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사무실로 옮긴 온아시아 (OnAsia moved to the new office)

방콕에는 내가 소속된 에이전시가 있다. 온아시아(OnAsia; www.onasia.com)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아시아에 관한 사진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곳이다. 오랫동안 동남아시아에 머물면서 포토저널리스트로 일해 온 영국인 피터 찰스워드와 이반 코헨 두 사람이 동업하여 문을 연 에이전시인데. AP통신에서 베테랑 포토 에디터로 명성을 쌓은 올리비에 닐슨도 최근에 합류했다. 세상에는 게티나 코비스처럼 국제적 대형 에이전시도 많지만 온아시아는 포토저널리스트들이 설립한 회사라 누구보다도 사진가의 마음을 잘 이해해줘서 마음에 든다. 대형 에이전시들이 심하게 표현하면 사진가를 착취하는 구조를 갖고 있는데 비해 온아시아는 비즈니스 파트너라기보다는 가족과 같은 생각이 들고, 구성원 간의 친밀도도 남다르다. 마침 며칠전 피터가 이메일을 통해 사무실을 옮겼다고 알려왔기에 구경도 할 겸 짬을 내어 온아시아를 방문했다.

지상철 BTS 수랏타니 역 바로 앞이라 교통도 매우 좋다. 온아시아가 새로 입주한 중국상공회의소 빌딩 (Thai CC Tower) 바로 정면에는 분홍색의 클래식한 3층짜리 건물이 자리잡고 있는데, 여기가 그 유명한 <블루 엘리펀트> 레스토랑이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태국에서 가장 음식 맛이 좋기로 유명한, 또 가장 값이 비싸기로 유명한 특급 식당이다.

보통 시내에 고층빌딩을 짓게 되면 그 자리에 있던 낡은 건물은 철거를 하게 마련이지만 여기선 오래된 식당 건물을 그대로 둔 채 빌딩을 뒤로 물려 지었다. 블루 엘리펀트 레스토랑 의 명성 때문일 것이다.

한 달 전인가, 주명덕 선생님과 폐쇄를 하루 앞둔 종로 한일관에서 비빔밥 먹던 생각이 났다. 그날, 종로 재개발 때문에 수십년 전통의 음식점이 문 닫는 것을 아쉬워하던 한일관 손님들이 문전성시를 이뤘었다. 한일관 건물은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래도 그 건물이 사라지고 빌딩이 들어선다니 안타까운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온아시아의 이번 사무실 이전은 서울로 치자면 광화문에 있던 사무실을 마포로 옮기면서 더 넓은 공간을 쓰게 된 것과 마찬가지이다. 방콕의 중심부 시암에 있는 빌딩에서의 공간보다 훨씬 넓은 곳으로 이사를 와서 근무 여건이 매우 쾌적해졌다. 공간도 공간이려니와 12층 사무실에서 보는 뷰가 멋지다. 방콕의 서쪽을 흐르는 차오프라야 강 쪽이 그대로 내려다보여 해가 질 때 환상이겠다. (물론 서향 창으로 들어오는 빛 때문에 모니터 보기는 피곤하겠지만)

사무실 한켠에서는 20여명이 태국 여자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서 여러 나라의 스태프들이 보내온 사진의 후반작업을 하느라 분주하다.

열심히 일하는 만큼 돈도 많이 벌어야 하는데.... 프랑스 출장 떠나는 이반은 빼고 피터와 올리비에에게 내가 점심 사겠다고 블루 엘리펀트 가자고 했더니 눈이 동그래지면서 손사래를 친다.

“거기 얼마나 비싸다고. 우리 같은 사람은 갈 곳이 아냐.”

결국 구내식당에서 30밧(1000원)짜리 국수로 점심을 때웠다.

태국에 오래 살아서인지 동양 사람이 다 된 착한 온아시아 식구들. 언제쯤 부자 될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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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아시아가 새로 입주한 Thai CC Tower 빌딩과 그 앞에 자리잡은 블루 엘리펀트 레스토랑. 값이 엄청 비싼 방콕의 명물 식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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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아시아 사무실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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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화된 사진을 살펴보는 올리비에와 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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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찰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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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에 닐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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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터칭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태국인 스태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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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전문가인 알렉스. 러시아 캄차카 출신이다. 내가 여름에 캄차카로 취재 갈 예정이라고 했더니 일하다 말고 캄차카의 자기 고향을 보여주겠다며 구글 어스를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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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연가 올리비에. 빌딩 벽에 누군가가 한글로 ‘금연. 어기면 벌금 2000바트’라고 써 놓았다. 한국 사람들이 여기서 담배 많이 피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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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공항 제2청사 오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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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공항 제2청사가 소리 소문없이 오픈을 했다. 2주전에 문을 열었다는데 신문에서도 그에 관한 기사를 읽은 기억이 없다. 1청사에서 2청사까지는 셔틀 트레인이 다닌다. 외국의 대형 공항에 터미널을 연결하는 모노레일이 많아 우리나라에는 저런게 언제 생기나 했더니 드디어 생겼구나. 그런데 열차를 타러 가는 동선이 좀 어정쩡하게 설계가 되어 있다. 처음에 공항 만들 때 이런거 감안하지 않고 만들었나?

셔틀트레인이 신기해서 사진을 몇장 찍었더니 보안요원이 냅다 달려와 촬영금지구역이라고 제지한다.
" 촬영금지구역? 왜?"
"국가중요시설입니다"
"국가중요시설은 사진 찍으면 안되나?"

사람들이 신기한듯 연신 사진을 찍어대는데 보안요원은 촬영 제지하느라고 제 일을 못하고 있다.
휴대전화를 들이대던 어떤 중년 남자는 보안요원이 사진촬영은 안된다고 제지하자 "눈이 안보여서 자판 자세히 보려고 전화기를 들고 있는데 왜 못하게 하냐?"며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여기가 올림픽 앞둔 베이징도 아니고 지금이 어느 세상인데 또 어떤 바보가 이런 명령을 내렸나.

촬영을 하면 절대 안되는 시설은 철저하게 막아야 하는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것까지 엉뚱한 규정을 만들어 여러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일은 없어져야 할텐데.
그나저나 보안요원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면 뭐하나. 이미 사진은 디지탈 파일로 변환이 되어 고스란이 담겨져 있는데.
코 앞으로 다가온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베이징에서는 올림픽 경기장 사진을 찍는다 못찍는다 말이 많은 모양이다. 어디에나 바보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시간이 지나면 그 바보들이 어디로 갔는지 죄다 사라져 버린다는거다.

군사정권 시절, 김포비행장에 착륙하는 여객기는 공항 시설 촬영을 막기 위해 창문을 모두 내려야했다. 그게 얄미워 바득바득 창틈으로 필요도 없는 김포공항 사진을 찍곤 했는데 스튜어디스가 난감해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요즘은 여객기 착륙할 때 창문이 닫혀 있으면 열라고 성화다. 비행기 착륙하는데 왜 모든 승객이 일률적으로 창을 닫거나 열어야 하는지는 정말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정말 심했던 곳은 광주공항. 공군비행장으로 함께 사용하는 광주공항에 비행기가 착륙할 때는 사진촬영 하면 큰일 난다는 아나운스가 서너번씩 나오곤 했다.
그때 그런 쓸데없는 명령 내렸던 인간들, 그 인간들 지금 다 어디서 뭐하고 있는지 정말 궁금하다.

궁금한 옛날 사람들 때문에 생각나는 옛날 일.
전에 직장 다닐 때 회사에 세스나 경비행기가 있어 중요한 사건이나 행사가 있으면 수색 비행장에 가서 세스나기를 타고 사진을 찍곤 했다. 그 항공사진을 사용하려면 보안사령부에 가서 검열을 받아야 하는데 그걸 담당하던 사람이 준위 계급의 군인이었다.

그는 사진을 보면서 빨갱이들이나 쓸 것 같은 새빨간 '유리용 색연필'로 보안에 걸릴만한 부분을 좍좍 그어댔다. 서울시내 전경을 촬영한 사진도 '인쇄불가'였다. 이유는 사진 한가운데 청와대 지붕이 5밀리 정도 크기로 찍혀있다는 것이었다. 청와대가 들어있지 않은 사진도 역시 '인쇄불가'다.  보안사령부 건물 귀퉁이가 2밀리 정도 보인다는거다.

세스나 경비행기에서 사진 신나게 찍은 후 보안사에 검열 받으러 갔다가 죄다 빨간색 '사용불가' 도장으로 떡칠을 해서 돌아오면 데스크로부터 '너 바람 쐬라고 비행기 띄웠냐? 어떡할래?' 야단을 맞곤 했다.
그때 그 보안사령부 사람들. 지금 다들 뭐하시는지. 심심하시면 구글어스에 들어가 자기 근무하던 보안사령부 마당에 심겨진 나무까지 자세히 볼 수 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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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 이음아트 서점 #1 - 토요일의 대학로


토요일 오후, 기상대 예보와 달리 장마비도 내리지 않고 선선한 날씨다.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대학로는 아린쥐 컬러 일색이었다. 청소부 아저씨도, 시위대도, 시위대 부모를 따라 나온 아이들도 모두 아륀쥐 색으로 코디를 했다.



토요일 오후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각자 취향 따라 여러가지 방법이 있겠지.
보다 나은 국가의 앞날을 걱정하며 시위에 참여하는 것도 한 방법이겠고...



애인과 멋진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즐기기도....



애인 없는 사람은 혼자 앉아서 PMP를...



그런데, 서점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있었다. 가장 우아한 모습.



대학로 상명대 분교 앞에 자리잡은 이음아트는 인문, 예술 서적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서점이다.




서점 안의 분위기는 매우 편하다. 큰 매장은 아니지만 있어야 할 책은 다 있다.




출판기념회 같은 문화 행사도 자주 열린다.


헉. 그러고보니 주인장 사진을 안 찍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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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 이음아트 서점 #2 - <몽골, 초원에서 부르는 편지> 출판기념회

대학로 이음아트 서점에서 '몽골, 초원에서 보내는 편지'의 출판기념회가 있었다. 작가들 대부분이 아는 사람들이라 (요즘은 끼리끼리 해먹는 일들이 다반사다) 늦게나마 출판기념회에 참가했다. (아니, 실은 제 시간에 오긴 했는데 대학로에서 시위 구경하느라 좀 늦었다.)
행사장에 들어서니 권태균 작가는 이미 말을 끝낸 후였고 석재현 작가가 '연설'을 하고 있었다.
'몽골, 초원에서 보내는 편지'는 출판기획자 이상엽씨가 '윈난, 고원에서 보내는 편지'를 낸 이래 아예 '어디어디에서 보내는 편지' 시리즈로 책을 내기로 작정하고 다시 만들어낸 책이다. ('달나라, 먼지구덩이에서 보내는 이메일'은 언제 나올라나?)

권태균, 윤광준, 이상엽, 진아라, 석재현, 강제욱 등 6명의 작가가 각기 몽골에 대한 '설'을 풀었다. 홍일점인 진아라씨는 잘 모르는 분인데 본인을 '아마추어'라고 소개했다. 이분 같은 아마추어가 많이 움직여야 재미있는 세상이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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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재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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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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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아라 작가 연설 도중 행사에는 아랑곳않고 카메라를 의식하며 포즈를 잡는 권태균 작가와 석재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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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칭 '구라왕' 윤광준 작가, <생활명품산책>이라는 베스트셀러의 저자이기도 하다. '아, 또 무슨 왕구라를 푸나' 했더니 이날은 대표작가답게 꽤 진지한 설명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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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의 변을 경청하는 독자들


헉. 모임의 주동자인 이 책의 기획자, 이상엽 작가를 안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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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의 광릉수목원

정말 오랜만에 광릉 국립수목원에 다녀왔다. 광릉내 입구에 전에 못보던 영어 간판이 서있다. 'National Arboretum'이라는 라틴어 어원의 이름이 뭔가 비장함을 느끼게 한다. 전에 못보던 것이 또 있다. 수목원 입구의 관광용 마차다. 예전에 크낙새 보려고 광릉 다닐 때는 참 한적한 시골이었는데...

요즘의 광릉수목원은 옛날같지 않아서 방문을 원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고 그러다보니 예약제다 뭐다 해서 큰 맘 먹고 준비하지 않으면 가기가 어렵다. 오후 3시에 들어갔는데 장마철인데도 화사한 날씨에 기분이 좋아져 사진은 많이 찍지 않고 대신 숲내음을 흠씬 들이마셨다. 이른 아침에 아름드리 나무 사이로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올 때의 신비스런 분위기는 느낄 수 없었지만 그런데로 분위기는 참 좋다. 숲 한가운데를 지나는데 갑자기 좋은 향이 퍼지길래 동행한 식물학자 이유미 박사에게 물으니 전나무가 내뿜는 것이란다. 이게 말로만 듣던 피톤치드 냄새인가?

일요일인데도 근무중이던 국립수목원 연구원 이유미 박사는 정말 정말 우리 꽃, 우리 나무를 사랑하는 분이다. 식물분류학을 전공한 학자 답게 <광릉 숲에서 보내는 편지>, <숲으로 가는 길>,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나무 백가지>, <한국의 야생화>, <우리는 숲으로 간다> 등 좋은 책들을 참 많이 쓰셨다. 사무실에 잠시 들렀더니 얼마전 베트남 출장 중에 사온 것이라면서 베트남산 커피를 타주느데 맛이 일품이다.

여름의 중턱에서 마음껏 자라나는 수목원의 식물들. 울타리 밖으로 나가 10분만 차를 달리면 먼지를 날리며 고층 아파트 공사가 한창 진행중인데... 수목원 안에 있는 녀석들은 참 행복하겠다. 이런 수목원이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딱 10개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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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arden #01 - June 2008



힘차게 돋아나는 능소화의 새싹




화려했던 5월의 영광을 추억하며 시들어가는 장미꽃



현란한 색깔을 뽐내는 여름꽃 한련의 암술과 수술



땅에 떨어진 목련 열매



꽃을 피우기 시작한 산수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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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박산성, 많은 사람들의 웃음을 산 컨테이너 바리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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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 만난 사람들

작업실이 광화문에 있다보니 요즘 바깥이 꽤나 소란하다.
개인적으로는 촛불시위에 부분 찬성, 부분 반대의 얄팍한 이중성을 가진 나이지만 그래도 역사의 현장을 지나칠 수는 없어 카메라를 들고 거리에 나섰다.
광화문에서 아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중에는 실로 몇년만에 보는 얼굴도 있다.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쇠고기 사태 끝나면 한번 봅시다"
인사를 하며 돌아다니다보니 '사진이라도 한장씩 촬영해둘걸'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오후에 만난 몇 사람을 사진 찍었다.


고명진 뉴시스 국장



고명진 선배는 한국민주화운동의 상징이 된 저 유명한 태극기 사진을 찍은 주인공이다. 1987년 6월 평화대행진이 벌어진 부산 문현로터리에서 웃옷을 벗은 한 시민이 "최루탄을 쏘지 마라"고 외치며 다탄두최루탄을 발사하는 경찰에게 달려가는 이 사진은 우리 모두의 머리에 각인된 한국 포토저널리즘의 역작이다. 이 사진은 1999년 AP가 선정한 20세기 100대 사진에 포함되기도 했다. 오늘도 현장을 뛰는 포토저널리스트로서 광화문 네거리에 선 고선배는 20년전 그날을 생각하며 무슨 감회에 젖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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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이 시대의 진보 논객 손호철 교수는 수첩 대신 캐논 EOS-! Mark2 카메라로 무장하고 사진을 촬영하고 있었다. 포토저널리스트들은 무얼 먹고 살라고?



임완호 다큐멘터리 감독



자연 다큐멘터리 감독인 임완호는 광화문에 왜 나타났을까?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 꼭대기에 황새가 둥지라도 틀었나?


김흥구 포토저널리스트



아틀라스프레스 (www.atlaspress.co.kr)에서 일하는 포토저널리스트 김흥구. 몇년 전 학생 시절의 앳된 모습은 간데 없고 제법 관록이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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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 #3

나는 서해안에 비브리오균이 발생했다는 뉴스가 나오면 그동안 비싸서 못 먹었던 회를 그제서야 사먹는 인간이다. AI 뉴스가 나오면 양평에 있는 ‘오리학교’(오리들 가르치는 학교가 아니라 오리를 죽여서 요리하는 식당이다)에 가서 오리고기를 먹거나 동네 치킨집에서 닭고기를 사먹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청개구리처럼 구는 이유는?
첫째, 남들이 다 안 먹어주면 장사하는 분들이 망할 것 같아서.
둘째. 이런 때 돈 주고 사 먹으면 장사하는 분들이 음식을 좀 더 많이 줄 것 같아서

그럼 비브리오균에 감염되거나 조류독감에 걸리면 어쩌냐고? 물론 걸릴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것도 운이 매우 좋아야 (확률적으로 봤을 때) 걸리는 것이다. 아무나 걸리는게 아니라는 말이다.

전염병이 돌 때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 병에 걸린다면 중세의 페스트나 천연두가 돌았을 때 사람들 다 죽어버렸게?
나는 그런거 따질 줄 모른다. ‘어떤 몹쓸 병이 돌아서 전인구의 20퍼센트가 작살이 났다.’ 그러면 조심해야겠지만 ‘감기가 유행인데 전인구의 1퍼센트가 걸릴 확률이 있다.’ 그러면 그 1퍼센트에 걸릴까봐 노심초사 하기보다는 대충 넘기면서 살아오던 방식대로 사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년전 사스인가 하는 역병이 한창 유행일 때 동남아 가는 여행객들이 줄줄이 예약 취소를 하자마자 나는 얼씨구나 하고 여행을 떠났었다.
나라마다 공항에선 마스크 쓰고 돌아다니는 인간들이 엄청 많이 보였다. 여행객도 마스크, 입국심사대, 세관의 공무원도 마스크. 모두들 마스크를 쓰고 서로를 불신의 눈으로 려보는 것이다.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매정한 인간성이 단번에 다 드러났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그래 이 녀석들아 너희들만 오래 살아라. 평생 마스크 쓰고... ’
그런데 주변에 감기 걸려서 기침 하는 사람이 있으면 무슨 큰일이나 난 듯이 험한 눈으로 쏘아보며 마스크를 여미던 사람들, 평생 마스크를 벗지 않고 살 듯하던 그 사람들이 일주일, 이주일 지나니까 슬슬 마스크를 벗더란 얘기다. 그때쯤 사스가 사그라들지 않았냐고? 천만에. 사스는 더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다만 사람들은 마스크가 계속 쓰고 다니기에는 엄청 귀찮은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진즉에 왜 못 깨달았는지... 

군대에 가면 포탄이 떨어진 자리에는 다시 탄환이 떨어질 확률이 적다고 하지 않나? 나는 지진이나 해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한번 지진이나 해일이 난 곳은 당분간은 다시 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그래서 쓰나미 나자마자 즉시 현장으로 달려갔다. 대한민국에서 쓰나미 며칠 후 현장에 온가족 데리고 찾아간 사람은 나밖에 없을 것이다.

지진이나 해일이 나면 미디어는 예외 없이 ‘여진의 공포’, ‘쓰나미 다시 덥친다’는 기사를 써대기 마련이다. 지난번 미얀마 사이클론도 예외는 아니어서 사이클론이 오자마자 ‘더 큰 사이클론 접근중’이라는 기사가 온 신문을 도배했다. 뉴올리언스 카탈리나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미디어의 속성이다.

‘그런거 다 믿고 어떻게 세상을 사나? 내 방식대로 줏대를 가지고 살아야지’라는 것이 이번 쇠고기 파동 때도 마찬가지로 내 머리 속에 있던 생각이었다.
더구나 광우병은 정부 발표에 의하면 걸릴 확률이 수천만분의 일이라지 않던가? (이런 말도 안되는 확률 계산은 누가 하는지 모르겠다만...)

어쨌건 나는 값싼 쇠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됐다는 말에 너무 기뻤다. 최근 몇 년간 나는 내돈 내고 쇠고기를 사먹어본 기억이 없다. 아니 그전에도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가진 돈은 많지 않은데 제 정신 있는 사람이 삼겹살 1인분 7천원이면 먹을 수 있는데 뭐하러 쇠고기 1인분 (실은 반인분도 안되는)에 3배의 값을 주고 먹겠는가. 그런데 그걸 좀 싸게 먹을 수 있다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 쇠고기 때문에 온 사방에서 사람들이 광화문으로 꾸역꾸역 모여들자 예의 그 심술이 발동했다. ‘그래 인간들아, 촛불 들어라, 나는 쇠고기 먹고 영양보충 좀 해야겠다.’

그런데 사태는 엉뚱하게 흘러갔다. 그래서 나도 광화문에 나서게 되었다. 물론 쇠고기에 대한 나의 생각은 변함이 없다. 미국 쇠고기 들어오면 열심히 먹어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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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검정 - 장마철 동네 뒷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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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 숲 공기를 마시고 싶어 아내와 함께 집 뒤편 빌라단지로 올라가는 산길에 들어섰다.
집에서 1분도 걸리지 않는 곳이건만 3년전 비글 키울 때 산책시키러 온 다음에 한 번도 찾지 않았었다.

장마철의 숲이란...
누군가 버리고간 다마스 자동차만 없었다면 여기가 세검정인지 보르네오 정글인지 헷갈릴 뻔 했다.
이렇게 울창한 숲을 지척에 두고도 컴퓨터 모니터 들여다보느라 와보지를 못하다니.

에구 아까워라. 그 ‘잃어버린 3년’을 어찌 되놀리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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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지연구소 극지지구시스템연구부 소속 연구원들이 동해시 두타산에서 남극운석탐사 하계 전지훈련을 했다.
자일 조작 요령과 암벽 등반 기초 훈련을 받는 연구원들의 이마에 땅방울이 송글송글하다.
제3차 남극 운석탐사대는 2008년 12월에 남극 티엘 산맥에 들어가 운석 탐사 활동을 벌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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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대구 사진비엔날레.
외국에서 작업하느라 비엔날레 관람은 포기하고 있었는데,
마침 스케줄이 바뀌는 바람에 마지막 날 새벽에 인천공항에 도착,
서둘러 대구로 내려가 전시장에서 사진을 내리는 와중에 마지막 관람을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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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다큐멘터리 잡지 아이로네에서 파키스탄 K2 특집기사를 실었다.
나의 사진이 산악사진가 Galen Rowell의 사진과 함께 게재되었는데,
어린 시절부터 산악인으로, 사진가로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던 갈렌 로웰과 나란히 지면에 게재된 것은 나로서는 영광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갈렌은 이 잡지가 인쇄되어 나오기 2주일전에 캘리포니아에서 부인 바바라와 함께 비행기 추락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누구도 가보지못한 오지를 다니며 영상미 뛰어난 산악사진의 정수를 보여주던 갈렌 로웰,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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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비봉에 올랐다 내려오다 구기동 입구에서 자동차에 국수를 놓고 파는 분을 만났다. 잠시 내가 비봉이 아닌 모란봉에 다녀왔나 하는 착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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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찾는 여행지' - 히말라야  (잡지 Elle 2008년 6월호)



                                                                                                         

히말라야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드높은 설산이 병풍처럼 이어지는 히말라야. 인간의 발길이 감히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그 험한 지형에도 사람들이 살아간다.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잘게 나뉘어진 수많은 산과 계곡은 오래전부터 거대한 산을 등지고 살아가는 여러 소수민족들의 고향이었다.

히말라야를 넘나든 지난 20여년의 세월동안 서쪽의 파키스탄으로부터 동쪽의 미얀마에 이르는 길고 긴 산맥의 많은 곳을 다녀봤지만 아직도 못 가본 지역이 많이 남아 있다.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던 히말라야 소수민족의 삶도 시간의 흐름과 함께 자꾸 변하고 있다. 수년전 엄청난 고생을 하며 들어갔던 오지를 다시 방문했다가 새로 잘 닦여진 도로에 놀라기도 하고 외지와 연결되던 단 한 대의 구식 전화가 고장나서 발을 동동 구르던 곳에 휴대전화 안테나가 세워진 모습을 만나기도 한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문명세계의 손길은 이제 히말라야 구석구석에까지 미치고 순수한 그들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자꾸 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그러나 골짜기는 어디에선가 끝이 나는 법. 어디서도 진짜배기 히말라야 사람들을 만나지 못할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그래서 나는 초조해진다. 그들이 더 변하기 전에 오랫동안 내려온 그들의 진짜 모습을 기록해두기 위해 배낭을 메고 히말라야로 향하는 여행이 점점 잦아지고 있다.



Ⓒ Park Jongwoo / O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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