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치 빙하의 마녀 스키
영화 해리포터를 보면 빗자루에 올라탄 채 하늘을 날아다니며 퀴디치라는 경기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낡은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닌다는 기발한 상상은 중세 유럽의 마녀 이야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중세의 전설 속에 등장하는 마녀는 모두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닌다는 특징이 있다. 16세기의 마녀 재판 기록은 빗자루에 대한 언급으로 꽉 차 있다고 한다. 16세기말 프랑스의 마녀 사냥꾼은 "마녀들이 빗자루를 넓적다리 사이에 끼우고 주문을 몇 마디 외우면 하늘로 몸이 떠올라 마녀모임에 갈 수 있다"고 기술할 정도였다.
물론 실제로는 빗자루를 가지고 아무리 연구를 해도 추진력을 발생시킬 방법이 없다. 그런데 매년 1월 중순, 스위스 알프스의 한 마을에서는 빗자루에 올라탄 사람들 1천여명이 하늘 위로 붕붕 날아다니는 행사가 벌어진다. 그 사람들이 이용하는 추진력이 바로 스키이다. 스키를 타고 활강하면서 작은 둔덕을 지나면 몸이 붕 뜨게 되는 원리를 이용하여 스키 스틱 대신 빗자루를 다리 사이에 끼고 하늘을 나는 희열을 맛보는 것이다. 이들이 벌이는 행사는 ‘마녀 활강’이라는 뜻의 헥센압파르트(Hexenabfahrt)라는 축제이다.
스위스 발레 칸톤(다른 나라의 주에 해당하는 스위스 지방자치 행정 구역)의 작은 산간 마을 블라텐. 알레치 빙하의 하단부인 벨알프 지역에서 유일하게 사람이 거주하는 곳이다. 발레 주의 중심 도시인 시용으로부터 블라텐까지는 한시간 남짓한 거리이다. 시용에서 이탈리아 국경을 향해 쭉 뻗은 고속도로는 이내 교통이 뜸한 국도로 바뀌더니 곧이어 구불구불한 산길이 나오고 경사가 급해지면서 알프스 산맥 깊숙한 곳으로 들어선다.
블라텐 마을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마녀의 동상이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고 마을 구석구석 마녀 동상이 서 있다. 동네의 가게마다 진열장에는 마녀와 관련된 물건이나 장식이 내걸려 있고 목조로 만들어진 낡은 통나무 집 현관에는 헝겊으로 만든 마녀가 실에 매달린 채 바람에 흔들거린다. 여기저기에서 마녀를 만나니 괜히 으스스해지는 기분이다. 왜 이 마을은 온통 마녀로 넘쳐나는 것일까?
옛날 블라텐 마을에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은 여자가 살고 있었다. 여자는 마녀에게 남편을 알레치 빙하에 떨어뜨려 죽여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결국 남편은 죽었지만 꿈꾸던 새 생활을 즐기기도 전에 그 여자도 바로 죽고 말았다. 아쉬움으로 이 마을을 떠도는 혼령이 된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은 마녀 옷차림으로 춤을 추며 축제를 벌이게 되었다. 축제 날 밤에 벌어지는 마녀 댄스는 독특한 의식이다. 온 마을 사람들이 모닥불 주변에 모여 굿겐 무지크라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기괴한 모습의 마녀로 분장을 하고 참가한다. 본격적인 마녀 댄스가 시작되기 전 음악대는 온 마을을 돌면서 흥을 돋군다.
다음날 아침 블라텐 마을에서 해발 3226미터의 호슈톡 산 정상으로 오르는 스키 리프트 앞에는 1천여명의 마녀들이 줄을 지어 길게 늘어섰다. 여러 나라에서 모여든 스키어들이 각기 다른 마녀 분장을 하고 스키 스틱 대신 커다란 빗자루를 든 채 줄을 서 있는 모습은 그 자체가 장관이다. 마녀 스키대회는 호슈톡 산 정상을 출발하여 알레치 빙하를 따라 내려오다 중간에 해발 2090미터의 벨알프 고원 지역을 통과한 후 해발 1320미터의 블라텐 마을로 돌아오게 된다. 총 활강 길이 12킬로에 수직 표고차로만 1800미터를 내려오는 이러한 스키 코스는 그리 흔한 게 아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스키어들이 이 마녀 스키대회에 모여드는 이유는 행사 자체의 재미와 더불어 알레치 빙하라는 대자연에서 마음껏 스키를 즐길 수 있다는 매력에 이끌리기 때문이다.
블라텐 마을에서 리프트를 타고 순식간에 고도를 1천 미터 올려 산 하나를 넘으니 온 세상이 환상의 슬로프로 변한다. 알프스의 아름다운 봉우리에 둘러싸인 알레치 빙하는 눈부신 흰 빛을 내뿜고 있다. 얼마 전 내린 폭설로 인해 두께 1미터가 넘게 쌓인 자연설이 푹신한 눈길을 만들고 있었다. 대회가 시작되면서 마녀 차림의 스키어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몰려온다. 그들은 슬로프를 미끄러지면서 입을 맞춰 요들송을 부른다. 요들이란 노래가 경쾌하고 빠른 줄로만 알았는데 의외로 애처롭고 구슬픈 곡조가 알프스의 계곡에 메아리친다. 마녀들의 복장은 매우 다양하다. 무서운 얼굴 분장, 목에 걸린 뱀, 모자에 붙인 거미 등은 기본이고 검은 굴뚝을 등에 지고 연기를 뿜으며 달리는 굴뚝 청소부 마녀, 여러 가지 악기를 갖추고 연주를 하는 악대 마녀, 엉덩이를 드러내고 스키를 타는 섹시 마녀 등등 자기만의 개성을 살린 디자인들이 돋보인다.
마녀 차림의 스키어들은 하나같이 목에 술병을 매달고 중간에 만나는 사람마다 술을 권한다. 마셔보면 한 모금만 들이켜도 속이 탈 것 같은 독한 양주, 진한 와인들이다. 이미 술에 취해 눈이 반쯤 풀린 스키어들도 눈에 띈다. 알레치 피스테의 경사는 만만치가 않다. 우리나라 스키장으로 치면 상급자, 최상급자 코스의 연속인데, 완전 음주 상태로 요들을 부르며 빗자루를 다리 사이에 끼고는 멋진 폼으로 활강해 내려간다. 대단한 스키 실력들이다.
알레치는 알프스에서 가장 길이가 긴 빙하이다. 해발 4158미터의 융프라우를 비롯, 아이거, 묀히 등 알프스 3개 명봉에서 흘러내린 이 빙하는 발레 지방의 벨알프까지 이어지는 장장 23킬로의 거대한 얼음의 강이다. 알레치 빙하의 남단부는 보존이 잘 된 숲을 지나는데, 이 숲이 유럽에서 가장 높은 지점에 있는 삼림보호구인 알레치발트(Aletschwald)이다. 해발 2천 미터의 높은 고산지대에 펼쳐진 소나무 숲은 알레치발트의 자랑이다. 알레치 숲 입구인 리더알프에는 스위스 최초의 환경보호센터가 있으며 이곳에서 운용하는 식물원은 알프스 고산식물을 관찰하기에 최적의 장소로 손꼽힌다. 알레치발트의 자연보호는 유별나다. 리더알프 지역에서는 휘발유를 사용하는 차량은 통행 자체가 금지되어 있다. 빙하 주변에 피어난 꽃 한송이, 썩어가는 나무 한 조각까지 자연 그대로 보존하려는 정신이 알레치 숲 자연보호구를 오늘날 유럽 환경 운동의 시발점으로 만든 것이다. 융프라우 알레치비에치호른 지역은 스위스 최초의 자연유산 후보지로 현재 유네스코에 신청되어 있는 상태다. 산을 좋아하고 스키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경하는 알프스, 거기에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색다른 경험을 더하고 싶다면 반드시 찾아볼만한 그런 특별한 곳이 바로 1월의 알레치이다.
Ⓒ Park Jongwoo / O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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