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llery/Asia'에 해당되는 글 127건

  1. 2008.10.30 필리핀 피나투보 화산 #2 (Aerial Shot of Caldera, Pinatubo Volcano, Luzon Island, Philippines)
  2. 2008.10.30 필리핀 피나투보 화산 #1 (Pinatubo Volcano, Luzon Island, Philippines)
  3. 2008.10.27 일본 고베 차이나타운 (Kobe Chinatown, Hyogo, Japan)
  4. 2008.10.27 일본 고베 야경 (Night Scene of Kobe, Japan)
  5. 2008.10.22 도쿄 진보초(神保町) 1
  6. 2008.10.21 도쿄 롯폰기 (Roppongi, Tokyo, Japan)
  7. 2008.10.19 일요일 밤, 신주쿠 (Sunday Night at Shinjuku, Tokyo, Japan)
  8. 2008.10.14 몽골 서부 알타이 지방의 카자흐족 (Kazakh Nomad of Altai, Western Mongol) 1
  9. 2008.10.09 이란 카스피해의 캐비어 산업 (Caviar Industry of Caspi Sea, Iran) 1
  10. 2008.09.28 술루해의 바다집시 (Sea Gypsies of Sulu Archipelago) #4
  11. 2008.09.28 술루해의 바다집시 (Sea Gypsies of Sulu Archipelago) #3
  12. 2008.09.28 술루해의 바다집시 (Sea Gypsies of Sulu Archipelago) #2
  13. 2008.09.28 술루해의 바다집시 (Sea Gypsies of Sulu Archipelago) #1
  14. 2008.09.22 안다만해의 바다집시 - <월간 포토넷> 10월호
  15. 2008.09.18 안다만해의 바다집시, 모켄 (Moken, The Sea Gypsy of Andaman)
  16. 2008.08.28 몽골 서부 알타이 지방의 카자흐족 (Kazakh of Altai Region, Bayan Ulgy, Western Mongolia) #4
  17. 2008.08.28 몽골 서부 알타이 지방의 카자흐족 (Kazakh of Altai Region, Bayan Ulgy, Western Mongolia) #3
  18. 2008.08.28 몽골 서부 알타이 지방의 카자흐족 (Kazakh of Altai Region, Bayan Ulgy, Western Mongolia) #2
  19. 2008.08.28 몽골 서부 알타이 지방의 카자흐족 (Kazakh of Altai Region, Bayan Ulgy, Western Mongolia) #1
  20. 2008.08.27 알타이 공화국 (Gorno Altai S.S.R.)

필리핀 피나투보 화산 #2 (Pinatubo Volcano, Luzon Island, Philippines)

피나투보 화구호 항공촬영 (Aerial Shot of Pinatubo Cald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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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피나투보 화산 #1 (Pinatubo Volcano, Luzon Island, Philippi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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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고베 차이나타운 (Kobe Chinatown, Hyogo,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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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고베 야경 (Night Scene of Kobe, Hyogo,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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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진보쵸 (神保町)

‘고서 축제’ 열리는 세계 최대의 헌책방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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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진보초 전철역 일대는 세계적인 고서점 거리이다. 지금은 치요다구로 들어갔지만 원래 간다구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이곳은 흔히 ‘간다(神田) 고서점가’로 불린다. 도쿄 토박이들의 자부심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간다 지역에는 1백여년 전 메이지 시대에 도쿄 대학을 비롯한 학교들이 여럿 자리 잡으면서 자연스레 수많은 서점들이 몰려들게 되었다. 몇 개의 대학들이 도시 외곽으로 이전했지만 아직까지도 진보초 역을 중심으로 헌 책을 다루는 서점들이 150여 군데 남아 있다. 고서점 마을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영국 헤이온와이의 헌책방 수가 40여개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진보초에 있는 헌책의 어마어마한 양을 가늠할 수 있겠다. 서점의 위치와 취급분야를 적어놓은 지도가 없으면 어디가 어딘지 종잡을 수가 없을 정도이다

진보초에는 헌책방뿐만 아니라 많은 출판사와 신간서점도 자리를 잡고 있다. 일본에서 문고판 독서 붐을 일으켰던 출판사 ‘이와나미(岩波) 북센터’를 비롯해 1881년에 개점한 산세이도(三省堂) 서점이 모두 진보초에 둥지를 틀고 있다.

헌책방이야 서울의 청계천에도 있었고 부산 보수동에도 많이 남아 있지만 진보초의 고서점과 우리나라의 헌책방이 다른 점은 이곳의 서점들이 각각 특정한 전문분야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사진집이나 희귀 지도만 취급하는 서점이 있는가하면 온갖 만화책만 쌓아둔 곳도 있다.

어떤 장르를 다루든 책을 대하는 주인들의 자세는 진지하기 짝이 없다. 진보초 고서점가 어느 가게를 들어가봐도 주인들이 정성들여 헌 책을 손질하는 장면과 쉽게 마주친다. 낡은 책이 들어오면 먼저 솔로 먼지를 털어낸 다음 마치 갓난아기를 돌보듯 한 장씩 페이지를 넘겨가며 정성들여 손때를 닦아낸다. 청소가 끝나면 붓으로 책의 제목과 가격을 써서 띠를 두른다. 아무리 낡은 책이라도 붓글씨가 적힌 책띠를 두르면 그럴듯한 모습으로 타시 태어나게 된다. 비로소 헌책이 새로운 주인을 맞을 준비가 끝나는 것이다. 이렇게 주인이 지극정성으로 책을 아끼다보니 진보초의 책방에 진열되는 책들은 비록 헌책일망정 고급품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이번 주에 진보초 헌책방 거리에서는 무려 100만권이 넘는 서적이 선보이는 ‘고서 축제’가 열린다. 10월 27일부터 1주일간 열리는 이 행사는 올해로 49회째를 맞는다. 축제 기간 중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와서 평소의 절반 가격으로 책을 구입하고 희귀본 경매에도 참가하게 된다.

세계10위권에 든 출판대국이지만 우리나라에선 절판된 책을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라 그 책을 만들어낸 출판사에서도 구하기가 어렵다. ‘책읽기의 계절’ 가을. 책을 찾는 이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도쿄 진보초 거리에서 지금은 규모가 줄어들어 점점 볼품이 없어지고 있는 서울과 부산의 헌책방 거리를 떠올리며 아쉬움을 달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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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롯폰기 (Roppongi, Tokyo, Japan), 그 옛날의 낭만은 사라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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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찾은 롯폰기. 미드타운과 롯폰기힐이라는 초대형, 최신식 고층빌딩이 들어서서 옛날의 정취를 버려놓았다. 빌딩들이 들어서기 전 낭만은  어디로 갔노.
롯폰기 역 주변엔 아프리카에서 온 삐끼들이 수두룩. 그 아해들 다 뭐해먹고 사는지..
일본은 참 재미있는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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윽! 골 때리는 환율

평생 처음으로 테입이 들어가지 않는 Tapeless Camera를 사용하다보니 이만저만 불편한게 아니다.

1시간 촬영했는데 20기가 용량의 메모리가 꽉 차버린다.
아무래도 SxS 카드와 외장하드가 하나씩 더 필요할 것 같아 신주쿠 요도바시 카메라에 들렀다.
오늘 환율은 1엔이 13.7원, 불과 1년전만해도 1엔=7원대이던 시절이 있었는데...
가격표를 보고 13.7을 곱했더니, 
억! 억! 심장이 뛰어서 도저히 물건을 살 수가 없다. 우째 이런 일이... ㅠㅠ
하는 수 없이 뒷골목에서 싸구려 저녁 먹고 숙소로 직행....
흑, 하필이면 환란 와중에 고국을 떠나게 되다니...
아, 이 경제위기는 언제나 끝이 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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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서부 알타이 지방의 카자흐족 (Kazakh Nomad of Altai, Western Mongol)

 

흐르는 물처럼 사는 사람들

끝없이 펼쳐진 풀밭 위에서 말을 타고 가축을 모는 유목민. 몽골이라는 나라에 대해 사람들이 가장 먼저 연상하는 것은 푸른 초원의 모습이다. 그러나 실제로 몽골은 평평한 초원지대라기보다는 평균 해발 1,500미터가 넘는 산악국가다. 특히 중국, 러시아, 카자흐스탄 등 3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몽골의 서쪽 끝은 알타이 산맥의 중심부로서 4,653미터 높이의 타반보그드 산을 비롯, 4,000미터가 넘는 봉우리들이 줄지어 솟아 있는 험준한 지역이다.

바얀울기 아이막(우리나라의 도에 해당하는 몽골의 행정단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지역은 지리적으로나 지형적으로 몽골에서도 가장 오지중의 오지에 속한다. 이곳은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타르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 찾아 가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몽골의 철도는 러시아와 중국을 연결하는 중단선로가 유일하기 때문에 동서로 넓게 퍼진 국토의 서쪽 끝으로 가려면 비포장 자동차 길을 달려 며칠을 가거나 비행기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울란바타르로부터 바얀울기 아이막의 행중중심지인 울기까지는 일주일에 두 차례 비행기가 다닌다. 그나마 단번에 가는 항공편은 없다. 수소문 끝에 찾아낸 고물에 가까운 러시아제 프로펠러기는 도중 두 곳의 경유지를 지났고 그때마다 양고기 푸대를 싣고 내리는 소란으로 인해 비행기에서 내려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중부 몽골의 여기저기에는 울창한 숲이 펼쳐진 곳이 많았다. 그러나 서쪽을 향해 가면 갈수록 숲은 점점 적어지고 바위로만 이루어진 산과 구릉이 이어졌다. 아침 일찍 울란바타르를 출발했는데 울기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3시.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울기 공항 청사를 나서자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한 마디로 ‘황량한 서부’였다.

울기 시내를 벗어나자 헐벗은 바위산 사이로 초원이 펼쳐졌다. 그러나 초원이라고 해도 우리가 생각하는 부드러운 풀들이 자라나는 초원하고는 거리가 멀다.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면 메마른 땅에 자라는 가시나무에 가까운 풀들이 대부분이다. 이곳에는 길이 따로 없다. 대강 목적지의 방향을 잡고 다른 자동차의 타이어 자국을 가늠하여 눈짐작으로 길을 찾는다.


유목인 카자흐들의 이사행렬

바얀울기에서도 가장 서쪽 구석의 알타이 산록. 빙하가 녹아 흘러내린 물로 산지초원이 형성된 이곳은 유목생활로 살아가는 카자흐족의 거주지이다. 카자흐족은 1920년대에 중국의 신쟝 위구르 자치구에서 이주해 온 투르크계 소수민족으로, 이들이 많이 모여 사는 바얀울기 아이막은 몽골에서 유일하게 몽골어와 카자흐어가 함께 공용어로 지정되어 있는 곳이다. 카자흐족은 몽골의 다른 종족들처럼 유목을 기반으로 살아가지만 언어나 풍습은 크게 다르다.

알타이 산맥 너머는 이들의 본향인 카자흐스탄이다. 그러나 서부 몽골의 카자흐인들은 고향땅의 사람들보다 더욱 카자흐인답게 살고 있다. 독실한 무슬림으로서 가축을 돌보다가도 시간이 되면 말에서 내려 메카를 향해 절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서부 몽골의 유목 방식은 몽골의 다른 지역에서 행해지는 스텝식 유목이 아니고 계절 이동을 하는 산악형 유목이다. 이들은 여름철에는 해발이 높은 산록으로 올라갔다가 추위가 심해지면 저지대에 형성된 동영지로 내려와 겨울철을 보낸다. 대부분의 카자흐족들도 이같은 유목패턴을 따르는데, 최근에는 동영지에 아예 마을을 형성해 베이스캠프로 삼고 초원을 순회하는 반 유목 생활을 하기도 한다.

한번 거주지를 옮기게 되면 짧게는 20-30킬로에서 멀게는 100킬로 이상씩 이동하기도 한다. 알타이 산록의 초원에서 길 아닌 길을 달리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카자흐인들의 이사행렬을 마주치게 된다. 여러 가구가 모여 하나의 유목집단을 이루는 이들의 이사 장면은 장관을 연출한다. 때로는 그 행렬이 2-3킬로에 달하는 경우도 있다.

오치사르의 가족은 가뭄으로 물이 말라서 원래 살던 곳으로부터 남쪽으로 60킬로 떨어진 계곡 초원으로 이동하는 중이라고 했다. 네 가구 13명이 17마리의 낙타와 6백여 마리의 양, 1백여 마리의 말을 이끌고 이틀간의 여행길에 올라 있었다. 남자들은 말을 타고 이리저리 뛰며 가축들의 방향을 인도하고 아낙네들은 텐트와 가재도구를 등에 가득 실은 낙타떼를 몰고 있었다. 말을 몰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은 나무상자에 넣어 낙타 등에 단단히 붙들어 맸다. 고양이와 함께 상자 속에 앉아 낙타에 매달려 있는 여자 아이는 이미 이 같은 생활에 단련이 되어있어서 그런지 전혀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이사에 동원된 낙타는 한 마리가 2백여 킬로그램의 짐을 옮긴다. 몽골의 낙타는 혹이 두 개 있는 박트리아 쌍봉낙타이다. 인도나 북아프리카 지역의 낙타에 비해 몸집이 훨씬 더 크고 털이 길어 기품이 당당하다. 매서운 추위도 이겨내는 강인한 박트리아 쌍봉낙타야말로 서부몽골의 유목민들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교통수단이다.

오치사르의 가족은 거대한 돌산 사이에 펼쳐진 초원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개울가를 새로운 야영지로 정했다. 거처가 정해지면 우선 이동식 천막인 게르부터 세운다. 게르는 골조를 이루는 수많은 나무막대기와 이 막대기로 만든 뼈대를 덮는 펠트제의 두터운 천으로 나뉘어진다. 카자흐족의 게르는 다른 몽골인들의 천막에 비해 훨씬 크기고 크고 화려하다. 따라서 구조도 복잡하고 부피와 무게도 훨씬 더 나간다.

가족들은 낙타에서 텐트를 내린 후 남녀노소가 함께 익숙한 솜씨로 집을 만들어 나갔다. 먼저 큰 기둥 두 개를 세우고 나무 막대기를 그물 모양으로 엮어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도록 만든 울타리를 둥글게 친 다음 기둥 위에 올린 원형의 천정과 울타리 사이를 80여 개의 긴 나무로 연결했다. 이렇게 해서 틀이 짜여지면 그 위에 펠트로 만든 덮개를 둘러씌우고 하얀 천을 덮은 후 끈으로 둘러매어 고정시킨다. 하나의 게르가 완성될 때 까지 걸린 시간은 20분 남짓. 게르의 복잡한 구조를 감안하면 놀랄 만큼 짧은 시간에 한 가족이 살 집이 완성되는 것이다.

곧이어 난로와 연통이 설치되고 불을 지피는가 싶더니 어느새 물이 펄펄 끓고 수태차가 만들어진다. 수태차는 끓는 물에 차와 버터를 섞은 넣은 것으로, 몽골 유목민들은 쉬지 않고 이 차를 마신다.

“이같은 이동을 거의 한달에 한번 정도 합니다. 평생을 이런 식으로 살기 때문에 집을 옮기는 것이 전혀 불편하지 않아요.” 시어머니를 도와 음식을 만들던 며느리가 야무지게 말했다.

1년에 10여 차례나 이동을 하므로 짐이 많으면 거추장스럽게 된다. 그래서 이들의 가재도구는 꼭 필요한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난로와 식기 몇 가지, 나무 궤짝 서너 개, 이불과 늘상 입는 옷가지 정도가 전부다.


하찮은 물건도 대접 받는 사연

무언가를 남기는 것이 없다는 점은 유목민족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하다.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제국을 건설했던 칭기즈칸 제국도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역사 속으로 홀연히 사라지고 말았다. 대제국의 수도였던 중부 몽골의 카라코람에는 당시 유적으로 작은 돌거북 4개만이 남아 들판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이 같은 행태는 유목민들의 태생적 검소함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유목경제의 비자급자족성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유목민들은 유목생활만을 통해서는 모든 생필품을 얻을 수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정주사회로부터 물품을 들여오게 되는데, 이 때문에 모든 물건을 귀중하게 여기고 함부로 버리지 않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다. 정주문명의 소비세계에 살다 온 사람에게는 이런 광경이 낯설기 마련이다. 게르 주변에서 촬영을 하면서 아무 생각 없이 쓰고 난 필름 통을 던져 버렸더니 아이들이 조르르 달려와 얼른 주워 갔다. 하찮아 보이던 필름 통도 여기서는 꽤나 쓸모 있는 물건인 모양이다. 그 뒤로는 꼬박꼬박 필름 통을 챙겨두었다가 아이들에게 전해주게 되었다.

한번은 오치사르에게 서울에서 가져간 양말을 선물로 주었더니 그 포장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그는 반짝이는 비닐봉지 속에서 양말을 꺼내더니 포장용 비닐봉지를 어디다 쓸까하고 고민하는 눈치였다. 쉽게 찢어지는 양말 포장용 비닐봉지는 내 눈에는 전혀 쓸모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이내 작은 바구니를 열더니 신분증명서를 꺼내 이 비닐봉지로 곱게 싼 후 “이제는 비를 맞아도 젖을 걱정이 없겠어요”라며 좋아했다.

이처럼 이곳에서는 버려지는 물건이 없었다. 1회용 라면을 담는 얄팍한 플라스틱 용기와 참치 통조림 깡통 등등 서울 같으면 매정하게 쓰레기통으로 처박힐 많은 물건들이 요긴하게 사용처를 찾고 제자리를 잡았다. ‘수퍼마켓에서 쓰레기통을 사서 비닐봉지에 넣어 집으로 들고 온 후 담아온 비닐봉지를 쓰레기통에 넣어버렸다’는 식의 서구식 소비방식은 이곳에서는 아예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물건은 수명이 다할 때까지 사용되고 수명이 끝나면 다시 용도가 바뀌어 마르고 닳도록 쓰여지는 것이다. 게르 안에서건 밖에서건 쓰레기통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들에게 쓰레기통을 가져다주면 좋은 물건을 담아두는 통으로 고이고이 간직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소박한 음식 ‘차강이데’

유목민들이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의 음식문화에 있다. 몽골 유목민들의 음식처럼 간소하고 간단한 음식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이들의 메뉴는 극히 단순하여 평생을 변치 않는 메뉴로 생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의 음식에선 도대체 쓰레기가 나올 이유가 없다. 먹을 만큼 먹다가 남으면 보관해두고 나중에 다시 꺼내먹으면 그만이다.

유목민의 주식은 고기류와 유제품으로 구성된다. 유제품은 ‘흰색 음식’이라는 뜻의 ‘차강이데’로 불려진다. 하지만 서부 몽골 어디에서도 이 차강이데를 팔지는 않는다. 그 대신 아무리 생활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이들 유목민이라 해도 손님이 게르를 방문하면 차강이데만큼은 반드시 대접한다. 차강이데에 속하는 유제품은 먹고 남으면 발효시켜 다른 유제품으로 만들 수 있어 버릴 일이 없다. 또 고기도 마찬가지로 필요한 만큼 잡고 남으면 말리거나 가루로 만들어 보관한다.

 
초원의 신성을 섬기고 그의 지시에 따라 이동한다

카자흐족의 유목생활은 일정한 패턴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넓게 보이는 초원이라 하더라도 금세 풀이 거덜나게 되고 한번 황폐화된 들판을 다시 목초지로 활용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수십 년의 세월이 걸린다고 한다. 따라서 유목생활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낭만적이지만은 않다. 오치사르와 같은 유목집단의 가장은 자기가 보유한 가축의 수와 현재의 초지 상태를 감안하고 앞으로의 기후 예측을 적절히 하여 이동의 시기와 장소를 결정하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외부인의 눈에는 우리들이 아무 초원에나 가축을 풀어놓고 대충 풀을 뜯게 하다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들은 초지를 보호하기 위해 농사를 짓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지요. 초원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잘 돌봐줘야 하거든요.”

과연 초원의 생태계는 기후에 무척 민감하다. 조금만 한발이 들면 목초가 그대로 말라죽고 비가 심하게 오면 그대로 홍수가 나 진흙밭으로 변한다. 유목민이 두려워하는 자연재해는 흰색재난(차강조트)과 흑색재난(하르조트)으로 나뉘는데, 차강조트는 폭설로 인해, 그리고 하르조트는 극심한 가뭄으로 풀이 자라지 않아 가축들이 굶어 죽는 것을 말한다. 이같은 초원의 재해는 가축을 주된 식량원으로 삼고 있는 유목민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목민들은 초원을 신성시하고 더럽혀지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인다.

“유목 생활이란 인간과 동물이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사람과 동물은 한가지예요. 도시 사람들이 자손에게 돈을 남겨주듯 우리는 자손에게 초원을 남겨줍니다. 초원을 망치면 자손들을 망치는 것이죠. 그래서 초원을 자식처럼 돌봅니다. ‘풀이 없으면 가축이 없고 가축이 없으면 식량도 없다’는 속담을 늘 잊지 않죠.”

후세를 위해 초원을 아끼고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 유목민들. 그들에 비해 모든 것이 한없이 풍요롭고 끝없이 행복할 것 같은 현대 산업사회의 실상은 어떤가. 어느 나라에서건 쓰레기 처리 문제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일회용품의 사용이 점점 많아지고 먹다 남은 음식 찌꺼기가 산더미처럼 나오며 상품을 잘 보이려는 목적의 과대포장이 넘쳐난다.

땅거미가 스며드는 초원의 저녁, 식사를 마친 후 1회용 플라스틱 스푼을 내다 버리려니 마땅히 버릴 곳이 없다. 하는 수 없이 개울로 가져가 스푼을 씻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가공식품과 포장식품을 먹고 일회용 용기에 담긴 음료수를 마시는 형태의 소비생활을 영위한다고 해서 행복이 그만큼 커지는 것인가. 우리가 가진 것들에 비하면 훨씬 보잘 것 없는 물건에도 만족해하며 삶에 가장 필요한 기본적인 것만을 갖고 아끼며 살아가는 가운데 행복을 느끼는 이들 유목민들. 이들의 생활방식은 어둠이 깔린 초원 속의 나를 흔들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소비 지상주의로 일관하는 우리 정주문명권의 현대인들에게 주는 교훈이 너무 크다고 하면 비약일까.


Ⓒ Park, Jongwoo / O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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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ocu.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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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카스피해의 캐비어 산업 (Caviar Industry of Caspian Sea, I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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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미국의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FP)는 머지않아 인류의 식탁에서 영원히 사라질 음식 다섯 가지를 선정해 발표했다. 그 가운데 가장 값이 비싸고 먹어보기 어려운 것이 바로 철갑상어의 알, 캐비아다. FP의 기사에 따르면 세계의 미식가들이 카스피해에서 나는 철갑상어를 앞다퉈 찾으면서 철갑상어는 점점 씨가 말라가고 있다. 가격이 1㎏당 1만달러에 달하는데도 수요는 줄지 않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점점 공급이 줄어들고 결국 철갑상어가 멸종에 이를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물론 FP의 기사는 과장된 감이 있지만 캐비아 맛보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캐비아는 왜 이렇게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을까? 그 이유는 바로 철갑상어의 남획 때문이다. 연어처럼 철갑상어도 민물에서 태어나 바다로 가서 자라는데, 알을 낳을 때가 되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는 모천 회귀본능이 있다. 전통적으로 철갑상어가 가장 많이 잡히던 곳은 볼가강이 카스피해로 흘러들어가는 하구 지역이었다. 그런데 구소련이 몰락하면서 러시아 마피아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고 일확천금에 눈먼 이들은 인부들을 고용하여 마구잡이로 철갑상어를 잡아들인 것이다. 하구에 그물을 설치하여 산란하러 올라오는 철갑상어를 남기지 않고 잡아들이자 불과 수년만에 카스피해의 철갑상어는 씨가 말라 버렸다.

한편 카스피해 남부의 이란은 러시아 이후 세계 제1의 캐비어 생산국으로 올라서게 되었다. 러시아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 모든 캐비어 관련 산업은 국가가 관리한다. 심지어 이란은 철갑상어 보호를 위하여 카스피해에서의 선박 통행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기도 하다.

이란의 카스피해 캐비어 산업의 주요 거점은 북부 투르크메니스탄 국경 부근의 반다르 이 투르크멘이다. 정부 수산국 소속의 배를 타고 카스피해로 나가면 바다 위에 지어진 캐비어 처리공장이 눈에 들어온다. 카스피해에는 여러 종류의 철갑상어가 사는데 그중 최고 품질의 캐비어를 생산하는 것은 벨루가란 어종이다. 벨루가는 완전히 성장하면 길이가 4미터까지 나가는 대형 어류이다. 철갑상어는 캐비어는 물론 고기맛도 좋아 부위별로 처리가 되어 해외로 팔려나간다.

철갑상어 사냥꾼들은 주로 투르크메니스탄 출신 어부들이다. 이들은 바다에 그물을 설치하고 다음날 철갑상어가 걸렸는지 확인을 한다. 철갑상어가 그물에 걸리면 보트에 싣고 막바로 바다 위의 처리공장으로 직행한다. 캐비어 만드는 과정은 매우 간단하다. 철갑상어로부터 알을 꺼내 그 자리에서 소금을 넣어 염장처리를 한 후 캔으로 포장하면 된다. 구두약통 크기의 100그램들이 캔에 담긴 벨루가 캐비어의 수출가격은 400달러 정도. 국제시장에서는 1,000달러에 판매가 된다.

이란은 철갑상어의 멸종을 막기 위해 철갑상어 연구소를 세우고 인공부화를 통해 태어난 치어를 매년 1백여만 마리씩 카스피해에 방류한다. 철갑상어가 ‘황금알을 넣는 거위’로 알려지자 몰래 철갑상어를 잡으려는 밀렵꾼들이 몰려들고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안간힘이다. 인류가 가진 최고의 음식 캐비어로 인해 카스피해에는 지금 소리 없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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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루해의 바다집시 (Sea Gypsies of Sulu Archipelago)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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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도 종교도 없이 떠돈다

바자우족의 수는 대략 1만5천 명. 원래는 필리핀의 술루 군도에서 살고 있었으나 언제부터인지 바다로 내몰려 땅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바자우족이 바다로 나간 사이 그들이 살던 육지는 스페인, 미국, 일본에 차례로 점령당했다. 술루해는 오랜 옛날 해적들이 활동했던 바다이고 최근 수십 년간은 필리핀 정부에 대항하는 모로 이슬람 해방전선의 게릴라들이 장악하고 있어 일반인들의 접근이 불가능한 지역이다. 육지에서 외국인에 내몰리고 바다에서 해적에 쫓기면서도 바자우는 용케도 바다에서의 삶을 개척했다.

바자우들은 언제나 육지에 집을 짓고 살기를 원하지만 이들이 원하는 섬에는 타우수그, 사말과 같은 이슬람 부족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어 함께 살기가 곤란하다. 뭍에 오르고 싶은 이들의 소망은 죽은 후에나 겨우 실현이 된다. 바자우족들은 술루해의 한 섬을 정하여 사람이 죽으면 이 섬에 시신을 매장한다.

 

세상에서 가장 순한 사람들

인류학자들은 바자우족을 전 세계의 소수민족 가운데 가장 순하고 착한 사람들로 꼽는다. 외부 사람들이 와서 카메라를 들이대면 화를 내거나 돈을 요구하는 소수민족들이 많지만 바자우는 그저 수줍은 표정을 지을 뿐이다. 그들 사이에는 싸움이 없고 우는 날보다 웃는 날이 많다. 이들은 어제의 슬픔과 걱정을 오늘까지 가져와서는 안된다고 믿는다. 바자우는 배를 몰 때나 고기를 잡아 올릴 때 언제나 노래를 부른다. 이처럼 노래와 춤을 좋아하지만 이들에게는 태평양의 다른 소수민족들에게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전투의 노래나 복수의 노래가 없다.

떨어지는 태양빛이 온 바다를 붉게 물들이는 저녁, 수앙푸쿨 마을의 두세 평 남짓한 나무 깔개 마당에 동네 여자 서너 명이 모여 아기를 어르며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다. 갑자기 그녀들이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남편들이 탄 고기잡이 배가 돌아오는 것이다. 햇빛에 그을리는 피부를 보호하려고 쌀가루를 개어 만든 ‘보락’을 희게 바른 얼굴에 환한 웃음이 퍼진다. 행복이란 이런 것일까? 여인네들은 주황색 열대어가 들어 있는 냄비를 들고 저녁밥을 짓기 위해 종종걸음으로 나무다리를 건너 서둘러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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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서 나서 물에서 죽는 바다의 떠돌이, 바자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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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파에 사는 우말라니씨 가족

먼 바다로 나가 바자우족의 고기잡이를 구경하다 하우스보트 한 척을 만났다. 바자우족들이 ‘레파’라고 부르는 하우스보트는 이들이 수상가옥을 짓기 전까지 집으로 삼고 살던 커다란 돛배이다. 지금까지도 바자우족 가운데 레파를 타고 물 위를 떠도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데 배의 한쪽 끝에 물을 담아두는 항아리가 있고 다른 한쪽에 화덕과 함께 부엌이 차려져 있어 그야말로 움직이는 집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스무 살이 넘은 바자우 사람은 누구나 레파에서 세상에 태어났다고 한다. 10여 미터 길이에 폭이 넓어 다른 고기잡이 배에 비해서는 꽤 큰 편이기는 하지만 지난 세대까지 바자우인들이 이런 배 위에서 일생을 보냈다니 믿기지가 않는다.

앞뒤에 조각을 하여 한층 멋을 낸 이 레파에는 우말라니 부부와 아들 하나, 세 식구가 오손도손 살고 있었다. 남편은 허리춤에 맨 줄을 배에 연결 한 채 물 속에 잠수하여 고기를 잡는 중이고 달리 놀잇감이 마땅치 않은 아이는 물고기를 손질하는 엄마를 거들고 있다.

바자우족들이 고기를 잡는 방법은 매우 독특하다. 술루 제도의 섬에 자라나는 ‘따후’라는 나무의 뿌리에는 고기를 마취시키는 성분이 있다. 따후를 망치로 두들겨 짓이긴 후 이것을 들고 반경 20여 미터의 물 속을 헤엄쳐 다니면 근처에 있던 물고기들이 제각기 비실비실하며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3~4분쯤 지난 후 커다란 체를 들고 물 속으로 들어간 우말라니는 한 번에 20여 마리 씩의 커다란 고기를 건져내어 배 위에 쏟아부었다. 배 위에 잡혀온 고기들은 한참을 기절한 채 있다가 나중에야 깨어나서 퍼덕거린다. 따후의 독은 인체에는 전혀 해가 없다니 이처럼 쉬운 고기잡이가 어디 있겠는가 싶다.

우말라니는 바람이 불면서 물결이 일자 서둘러 물에서 나와 돛을 올린다. 바자우들은 변화무쌍한 술루해의 기상에 언제나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술루해는 태풍이 처음 만들어지는 곳에 위치하고 있지만 의외로 일년 내내 바다가 잠잠한 편이다. 그러나 때로는 큰 풍랑이 일어 재난을 일으키기도 한다. 바자우에게 있어 대자연은 생의 동반자이자 거역할 수 없는 위대한 힘으로 군림하고 있다.

 
바람과 바다를 읽어내는 재주

태어나면서부터 바람과 익숙해져 있는 이들은 바람과 함께 일하고 함께 하는 법을 배운다. 바람과 바닷물을 관찰하여 풍랑의 정보를 예견하고 바닷물에 손가락만을 담가보고서도 지금 있는 곳이 어디쯤이며 목적지에 얼마 후에 도착하리라는 것을 정확히 짚어낸다. 땅에 사는 우리들이 땅 위의 여러 지형에 무슨 고개, 무슨 산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이를 기억하는 것과 같이 바자우족은 누구나 머리 속에 바다의 지도를 가지고 있다. 이같이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이들은 멀리 셀레베스해(인도네시아 중부에 위치한 대순다 열도의 셀레베스 섬 북쪽 바다)까지 고기잡이를 나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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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서 나서 물에서 죽는 바다의 떠돌이, 바자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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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는 자가용, 마을은 수족관

바자우족들은 바다를 떠다니다 집에 도착하면 배를 기둥에 묶어놓고 집으로 올라간다.
육지 사람들이 자기 집 주차장에 차를 넣어두는 것과 같다. 집과 집 사이에는 엉성한 나무다리가 놓여 있어 이 다리를 이용해서 이웃집을 왕래하게 된다.
그러나 말이 다리이지 군데군데 빈틈이 있는데다 흔들흔들 움직여서 처음 오는 사람은 다리 위를 걷기가 매우 무섭다.

바자우의 마을 안으로 배를 몰고 들어가면 마치 거대한 수족관에 들어온듯한 착각이 든다.
바다 속에는 ‘우나시’라는 이름의 해초가 무성하게 자라있고 그 사이사이로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열대어들이 떼를 지어 헤엄쳐 다닌다.
팔뚝만한 해삼과 주먹만큼 큰 성게가 지천으로 깔려 있다.
벌거벗은 채 물 속에 첨벙 뛰어들어 이리저리 열대어를 쫓아다니는 동네 개구쟁이들의 몸놀림이 물고기과 별만 다르지 않다.


양식의 밭, 바다


동네에서 멀지 않은 곳에 부표가 떠 있고 마을 사람들이 물 속에서 분주히 일을 하고 있다.
수심이 매우 낮아 1미터에도 미치지 않는 이곳은 해초를 기르는 바다의 밭이다.
우리네 텃밭과 마찬가지로 김, 미역 등과 같은 해초를 재배하여 먹기도 하고 외지로 내다 팔기도 한다.
작은 해초의 싹을 줄에 묶어 바다에 넣어주면 일주일 만에 다 자라 거들 수 있다니 손쉽게 돈벌이를 하는 셈이다.
육지의 채소와 달리 병충해 걱정도 없고 그대로 두었다가 거둬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술루해의 평균 수심은 5미터 정도이다. 겉에서 보면 다 같은 바다이지만 자세히 보면 물빛이 다르다. 물빛이 다르다는 것은 수심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앙푸쿨 마을의 수심은 겨우 1미터. 그러나 물빛이 시커멓게 보이는 곳은 수심이 100미터 가까이나 된다.
큰 고기들은 이런 곳에 모여 산다. 바자우들은 배를 몰고 수심이 깊은 곳으로 가서 상어나 가오리와 같은 고기들을 낚아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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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서 나서 물에서 죽는 바다의 떠돌이, 바자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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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 위에 집을 짓고 사는 바자우족

수평선 위에 아스라이 보이던 검은 점들이 점점 커지면서 집의 모양이 나타난다. 배가 가까이 다가가자 물 위에 지어진 수상가옥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육지라곤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에 살고 있는 바다의 떠돌이 바자우족의 마을이다. 보르네오 섬 동북쪽으로부터 필리핀 민다나오 제도까지 이어지는 술루해는 수심이 얕은 바다이다. 이 바다는 바자우족이 태어나서 자라는 집이고 이들이 살아가는 생활터전이기도 하다.

술루해의 수상족이 처음 세상에 알려진 것은 1521년 세계일주 항해를 하던 마젤란에 의해서다. 당시 마젤란의 항해일지는 바자우족을 ‘땅 위에서 살지 못하고 평생을 바다 위에 떠 있는 배에서 사는 사람들’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5백여 년 전 바자우족들이 살아가던 모습은 사실 십수년 전까지만 해도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때까지 바자우들은 너나없이 배에서만 생활을 하며 술루해의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바다에 통나무를 꽂고 그 위에 집을 지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100여 가구가 모여 가장 큰 바자우촌을 이루고 있는 수앙푸쿨 마을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던 마무드 말라봉은 ‘동력선이 들어와 열대림이 가득 들어찬 보르네오 본토를 다닐 수 있게 되면서 뱃길로 이틀을 항해하여 그곳에서 통나무를 실어와 바다 위에 집을 짓는다’고 설명한다.

어떤 집에는 두세 개의 방과 함께 나무 발을 깔아놓은 제법 널찍한 마당이 있어 이곳에서 해초나 생선을 말리기도 한다. 하지만 나무를 구해오지 못하는 집들은 그야말로 달랑 방 한칸만 바다 위에 서 있을 뿐 발 하나 내디딜 공간조차 없다. 바자우족의 집은 방 한쪽에 구멍이 뚫려 있어 이곳으로 음식찌꺼기나 쓰레기를 버리기도 하고 용변을 보기도 하는데 밀물과 썰물의 들락거림으로 반나절이면 깨끗이 씻겨나가 자연적으로 청소가 된다.

배보다는 수상가옥이 낫기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바다 위에서 살아가는 고달픔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 물이 귀해 비라도 내리면 한바탕 난리가 벌어진다. 집에 있는 그릇이란 그릇은 모두 꺼내 지붕 모서리에 매달아 빗물을 받는다. 그나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열대성 소나기가 퍼부어주니까 견딜만하지 그렇지 않으면 식수 때문에 바다에서 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바다 위에 전기가 있을 리 없고 해가 지면 꼼짝없이 집 안에 틀어박혀 날이 밝을 때까지 긴 밤을 보내야 한다. 어쩌다 풍랑이라도 몰아치면 주민들은 목숨을 하늘에 맡기고 바다가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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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a Gypsy with Nikon D90


진행 : 심은식, 김주원 기자

촬영, 글 : 박종우
촬영장소 : 안다만해
촬영지원 : 니콘 이미징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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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에서 살지 못하고 정처 없이 바다를 떠돌아다니는 바다집시. 지구상에는 세군데 지역에 이 바다집시들이 나뉘어 살고 있다. 태국과 미얀마 국경, 안다만해의 모켄(Moken)족, 필리핀과 보르네오 국경, 술루해의 바자우(Badjau)족, 그리고 마다가스카르 섬 모잠비크해의 베조(Vezo)족이 그들이다.

세 군데의 바다집시들은 생활방식과 민속이 비슷한 점이 많아 일부 인류학자들은 이들이 원래 고향이던 말레이시아 해변으로부터 몬순에 의해 생겨나는 취송류를 타고 멀리 아프리카까지 이주해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들 바다집시는 해상에 떠 있는 배에서 태어나 한평생을 물 위에서 살아가며, 죽은 후에야 비로소 육지에 묻히게 된다. 바다집시는 보통 산호초 지대의 얕은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지만 건기에는 배를 타고 먼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는다. 그리고 우기에는 작은 섬의 해변에 지어놓은 집에 머물며 몬순이 끝나기를 기다린다.

10여년 전부터 술루해의 바다집시 생활을 기록해온 나는 2004년말 쓰나미가 닥칠 당시 우연히 태국에 있다가 현지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안다만해의 바다집시 모켄족 작업까지 시작하게 됐다. 안다만해의 모켄족은 쓰나미가 있던 날 조상 대대로 전해져온 바다에 대한 탁월한 예견으로 해일이 닥칠 것을 짐작하고 산으로 대피하여 인명 피해를 내지 않음으로써 전 세계 미디어의 조명을 받았다. 목숨은 건졌지만 쓰나미는 그후 바다집시들의 생활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았다. 바다가 위험하다고하여 태국 정부에 의해 육지의 난민 캠프로 소개된 이들 모켄족은 본토에 남으려하는 젊은층과 고향인 바다로 돌아가려는 연장자층 사이에 세대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육지의 새로운 문화를 경험한 젊은이들은 고달팠던 바다의 기억을 잊으려는 반면에 바다만 바라보고 살아온 기성세대는 답답한 육지를 벗어나 삶의 터전인 바다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쓰나미 이후 3년간 수시로 모켄족의 갈등과 마지막 바다생활을 기록해나가던 중 10월에 이들의 이야기를 TV다큐멘터리로 소개하게 되어 마지막 촬영을 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 소식을 듣고 포토넷과 니콘에서 새로 출시되는 D90으로 작업을 하면서 프리뷰를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의를 해왔다. 그동안 바다집시를 취재하러 갈 때마다 비디오 촬영장비에다 스쿠바 장비까지 합해져 아무리 줄이고 줄여도 짐의 무게는 늘상 100킬로에 육박했었다. 그런데 가볍기로 소문난 D90을 써보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포토넷 원고 마감날인 10월 17일까지 어림잡아 1주일 정도의 현지 취재 기간을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아 덜컹 약속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현지에 와보니 상황은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몬순이 아직 물러가지 않은 안다만해는 거칠기 짝이 없었고 어선들도 항구에 발이 묶인 채였다. 매일 오후 스콜이 쏟아져 내리면 강풍이 불면서 바다는 성난 파도를 해변에 쏟아부었다. 무작정 취재 약속을 하고 온 것을 후회했으나 이제 와서 서울에 연락할 길도 없고 마감일은 숨통을 조이듯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었다.

나흘을 기다린 후 드디어 비가 그쳤다. 소형 선박의 출항은 여전히 금지된 상태였지만 막무가내로 사공을 구슬러 겨우 쪽배를 띄울 수 있었다. 한국의 추석날 아침이었다.

망망대해로 나가자 파도는 점점 거세지고 비까지 내렸다. 파도가 뱃전에 부딪칠 때마다 물보라가 쏟아져 들어왔다. 배를 덮치는 거센 파도를 사진에 담고 싶었으나 장비를 꺼내는 순간 바닷물을 뒤집어쓸것 같아 참을 수 밖에 없었다. 목적지인 수린섬까지는 60킬로. 보통은 5시간 걸리는 거리지만 거친 파도를 헤쳐나가느라 6시간이 넘게 걸렸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드디어 도착한 수린섬. 2년전 마지막 왔을 때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급한 마음에 비디오 카메라와 D90을 꺼내 취재를 시작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해가 기울더니 곧 어둠이 찾아왔다.

안다만해 수평선 위로 한가위 보름달이 떠올랐다. 이곳의 추석 달도 한국의 보름달처럼 휘영청 밝다. 잔잔한 바다는 달빛을 받아 금빛 물결을 일으킨다. D90의 노이즈 억제력이 발군이라던데, 테스트 삼아서 ISO3200에 세팅을 하고 보름달 달빛만으로 촬영을 했다. 정말 대단하다. 밤 10시에 촬영했는데 노이즈가 거의 없는 사진이 마치 대낮처럼 찍혀 나왔다. 이 카메라 누가 설계했지? 이런 물건이 자꾸 생기니 사진가들은 점점 작업량이 늘어날 수 밖에 없다. 앞으로 오지에 취재가면 밤에도 쉬지 못하게 될게 불을 보듯 뻔하다. 디지털 카메라로 바꾸면서 잠 자야 할 밤시간에 파일 정리하느라고 가뜩이나 잠이 모자란데 정말 걱정이다.

D90의 동영상 촬영기능인 D-Movie는 한국에서 하루 테스트를 해보고 온 덕분에 어렵지 않게 사용할 수 있었다. 카메라 바디 뒤편의 LV (라이브뷰) 버튼을 눌러 모니터에 화상을 띄우고 OK버튼만 누르면 동영상이 촬영된다. D90의 동영상 촬영은 24fps의 Motion-JPEG 모드로 기록이 된다. 즉 1초에 24장의 JPG사진을 촬영하여 움직이는 화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화질은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훌륭하나 결정적으로 자동 초점이 지원되지 않는 점이 불편하다. 그러나 영화용 카메라는 원래 자동 초점이 안되는 것이 매력이다. 비디오 카메라가 하나의 줌렌즈만 장착되어 있는 반면에 D90은 여러 가지 교환렌즈를 사용할 수 있어 마치 영화를 촬영하듯이 작업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수평으로 팬닝을 할 때 화면이 울렁거리는 롤링 셔터 현상이 있으나 팬닝의 속도를 느리게 하여 어느 정도 커버할 수 있었다. 동영상을 촬영할 때는 CCD가 열을 많이 내기 때문에 연속으로 5분이상 촬영하지 않도록 권장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필드에서 5분씩 연속촬영을 하는 일이 거의 없는 내게는 크게 문제되지 않는 부분이다.

HD화질로 기록할 경우 저장매체인 SD카드에 담을 수 있는 용량에 한계가 있는 것은 아쉬운 점이었다. 평소 CF카드만을 사용하기 때문에 니콘에서 3개의 SD카드를 빌려왔는데 저장공간을 아껴가면서 촬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비디오와 스틸 작업을 병행하다보면 2기가짜리 SD카드는 금새 차버렸다. 파도에 젖을까봐 여러 가지 충전기와 노트북 컴퓨터를 섬에 가지고 오지 않았던 것도 화근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섬에는 전기가 없어 장비가 있어도 충전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다음날 아침, 사공이 오전 밀물 시간에 섬을 빠져나가야만 한다고 성화를 해댔다. 하늘도 다시 꾸물거리며 언제 변덕을 부릴지 알 수가 없다. 게다가 지금은 수린섬이 출입통제기간이라 외국인이 상륙한 것을 당국이 알게 되면 큰일 난다는 것이다. 이날 아침 모켄족이 바다 속을 잠수하여 작살로 고기를 잡는다고 해서 따라가기로 했는데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 하는 수 없이 바다집시들이 수중에서 사냥하는 것을 1시간 남짓 촬영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아쉬웠던 1박2일의 취재. 그러나 D90이 있어서 행복했다. 육지에 돌아가 인터넷을 통해 마감을 하고 나면 다시 다른 섬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번에는 마감 걱정없이 마음대로 원하는 사진을 촬영해볼 계획이다. 날밤을 새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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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만해의 바다집시, 모켄 (Moken, The Sea Gypsy of Anda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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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소박한 음식 ‘차강이데’

유목민들이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 또다른 이유는 그들의 음식문화에 있다. 몽골 유목민들의 음식처럼 간소하고 단촐한 음식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이들의 메뉴는 극히 단순하여 평생을 변치않는 메뉴로 생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의 음식에선 도대체 쓰레기가 나올 이유가 없다. 먹을 만큼 먹다가 남으면 보관해두고 나중에 다시 꺼내어 먹으면 그만이다.

유목민의 주식은 고기류와 유제품으로 구성된다. 유제품은 ‘흰색 음식’이라는 뜻의 ‘차강이데’로 불려진다. 하지만 서부 몽골 어디에서도 이 차강이데를 팔지는 않는다. 그 대신 아무리 생활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이들 유목민이라 해도 손님이 게르를 방문하면 차강이데만큼은 반드시 대접한다. 차강이데에 속하는 유제품은 먹고 남으면 발효시켜 다른 유제품으로 만들 수 있어 버릴 일이 없다. 또 고기도 마찬가지로 필요한 만큼 잡고 남으면 말리거나 가루로 만들어 보관한다.

 

초원의 신성을 섬기고 그의 지시에 따라 이동한다

카자흐족의 유목생활은 일정한 패턴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넓게 보이는 초원이라 하더라도 금세 풀이 거덜나게 되고 한번 황폐화된 들판을 다시 목초지로 활용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수십년의 세월이 걸린다고 한다. 따라서 유목생활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낭만적이지 만은 않다. 오치르와 같은 유목집단의 가장은 자기가 보유한 가축의 수와 현재의 초지 상태를 감안하고 앞으로의 기후 예측을 적절히 하여 이동의 시기와 장소를 결정하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외부인의 눈에는 우리들이 아무 초원에나 가축을 풀어놓고 대충 풀을 뜯게 하다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들은 초지를 보호하기 위해 농사를 짓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지요. 초원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잘 돌봐줘야 하거든요.”

과연 초원의 생태계는 기후에 무척 민감하다. 조금만 한발이 들면 목초가 그대로 말라죽고 비가 심하게 오면 그대로 홍수가 나 진흙밭으로 변한다. 유목민이 두려워하는 자연재해는 흰색 재난(차강조트)과 흑색재난(하르조트)으로 나뉘는데 차강조트는 폭설로 인해, 그리고 하르조트는 극심한 가뭄으로 풀이 자라지 않아 가축들이 굶어 죽는 것을 말한다. 이같은 초원의 재해는 가축을 주된 식량원으로 삼고 있는 유목민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목민들은 초원을 신성시하고 더럽혀지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인다.

“유목 생활이란 인간과 동물이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사람과 동물은 한가지예요. 도시 사람들이 자손에게 돈을 남겨주듯 우리는 자손에게 초원을 남겨줍니다. 초원을 망치면 자손들을 망치는 것이죠. 그래서 초원을 자식처럼 돌봅니다. ‘풀이 없으면 가축이 없고 가축이 없으면 식량도 없다’는 속담을 늘 잊지 않죠.”

후세를 위해 초원을 아끼고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 유목민들. 그들에 비해 모든 것이 한없이 풍요롭고 끝없이 행복할 것 같은 현대 산업사회의 실상은 어떤가. 어느 나라에서건 쓰레기 처리 문제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일회용품의 사용이 점점 많아지고 먹다 남은 음식 찌꺼기가 산더미처럼 나오며 상품을 잘 보이려는 목적의 과대포장이 넘쳐 흐른다.

땅거미가 스며드는 초원의 저녁, 식사를 마친 후 1회용 플라스틱 스푼을 내다 버리려니 마땅히 버릴 곳이 없다. 하는 수 없이 개울로 가져가 스푼을 씻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가공식품과 포장식품을 먹고 일회용 용기에 담긴 음료수를 마시는 형태의 소비생활을 영위한다고 해서 행복이 과연 그만큼 커지는 것인가. 우리가 가진 물건들에 비해 이를데 없이 보잘 것 없는 물건들에도 만족해 하며 삶에 가장 필요한 기본적인 것만을 갖고 아끼며 살아가는 가운데 행복을 느끼는 이들 유목민들의 생활방식은 어둠이 깔린 초원 속의 나를 흔들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소비 지상주의로 일관하는 우리 정주문명권의 현대인들에게 주는 교훈과 시사하는 바가 너무 크다고 하면 비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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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은 물건도 대접 받는 사연

무언가를 남기는 것이 없다는 점은 유목민족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하다.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제국을 건설했던 칭기즈칸 제국도 아무 것도 남긴 것 없이 역사속으로 홀연히 사라지고 말았다. 대제국의 수도였던 중부 몽골의 카라코람에는 당시 유적으로 작은 돌거북 4개만이 남아 들판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이같은 행태는 유목민들의 태생적 검소함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유목경제의 비자급자족성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유목민들은 유목생활만을 통해서는 모든 생필품을 얻을 수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정주사회로부터 물품을 들여오게 되는데 이 때문에 모든 물건을 귀중하게 여기고 함부로 버리지 않는 습관이 몸에 배어있다. 정주문명의 소비세계에 살다 온 사람에게는 이런 광경이 낯설기 마련이다. 게르 주변에서 촬영을 하면서 아무 생각 없이 쓰고 난 필름 통을 던져 버렸더니 아이들이 조르르 달려와 얼른 주워 갔다. 하찮아 보이던 필름 통도 여기서는 꽤나 쓸모 있는 물건인 모양이다. 그 뒤로는 꼬박꼬박 필름통을 챙겨두었다가 아이들에게 전해주게 되었다.

한번은 오치르에게 서울에서 가져간 양말을 선물로 주었더니 그 포장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그는 반짝이는 비닐봉지 속에서 양말을 꺼내더니 포장용 비닐봉지를 어디다 쓸까하고 고민하는 눈치였다. 쉽게 찢어지는 양말 포장용 비닐봉지는 내 눈에는 전혀 쓸모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이내 작은 바구니를 열더니 신분증명서를 꺼내 이 비닐봉지로 곱게 싼 후 ‘이제는 비를 맞아도 젖을 걱정이 없겠어요’라며 좋아했다.

이처럼 이곳에서는 버려지는 물건이 없었다. 1회용 라면을 담는 얄팍한 플라스틱 용기와 참치 통조림 깡통 등등 서울 같으면 매정하게 쓰레기통으로 처박힐 많은 물건들이 요긴하게 사용처를 찾고 제자리를 잡았다. ‘슈퍼마켓에서 쓰레기통을 사서 비닐봉지에 넣어 집으로 들고 온 후 담아온 비닐 봉지를 쓰레기통에 넣어 버렸다’는 식의 서구식 소비방식은 이곳에서는 아예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물건은 수명이 다될 때까지 사용되고 수명이 다되도 다시 용도가 바뀌어 마르고 닳도록 쓰여지는 것이다. 게르 안에서건 밖에서건 쓰레기통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들에게 쓰레기통을 가져다주면 좋은 물건을 담아두는 통으로 고이고이 간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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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인 카자흐들의 이사행렬

바얀울기에서도 가장 서쪽 구석의 알타이 산록. 빙하가 녹아 흘러내린 물로 산지초원이 형성된 이곳은 유목생활로 살아가는 카자흐족의 거주지이다. 카자흐족은 1920년대에 중국의 신쟝 위구르 자치구에서 이주해 온 투르크계 소수민족으로, 이들이 많이 모여 사는 바얀얼기 아이막은 몽골에서 유일하게 몽골어와 카자흐어가 함께 공용어로 지정되어 있는 곳이다. 카자흐족은 몽골의 다른 종족들처럼 유목을 기반으로 살아가지만 언어나 풍습은 크게 다르다.

알타이 산맥 너머는 이들의 본향인 카자흐스탄이다. 그러나 서부 몽골의 카자흐인들은 고향땅의 사람들보다 더욱 카자흐인답게 살고 있다. 독실한 무슬림으로서 가축을 돌보다가도 시간이 되면 말에서 내려 메카를 향해 절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서부 몽골의 유목 방식은 몽골의 다른 지역에서 행해지는 스텝식 유목이 아니고 계절 이동을 하는 산악형 유목이다. 이들은 여름철에는 해발이 높은 산록으로 올라갔다가 추위가 심해지면 저지대에 형성된 동영지로 내려와 겨울철을 보낸다. 대부분의 카자흐족들도 이같은 유목 패턴을 따르는데 최근에는 동영지에 아예 마을을 형성해 베이스캠프로 삼고 초원을 순회하는 반유목 생활을 하기도 한다.

한번 거주지를 옮기게 되면 짧게는 20-30킬로에서 멀게는 100킬로 이상씩 이동하기도 한다. 알타이 산록의 초원에서 길 아닌 길을 달리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카자흐인들의 이사행렬을 마주치게 된다. 여러 가구가 모여 하나의 유목집단을 이루는데, 대가족이 소유한 모든 가축들을 데리고 이동하므로 이들의 이사 장면은 장관을 연출한다. 때로는 그 행렬이 2-3킬로씩 이어지기도 한다.

오치사르의 가족은 가뭄으로 물이 말라서 원래 살던 곳으로부터 남쪽으로 60킬로 떨어진 계곡 초원으로 이동하는 중이라고 했다. 네가구 13명이 17마리의 낙타와 6백여 마리의 양, 1백여 마리의 말을 이끌고 이틀간의 여행길에 올라 있었다. 남자들은 말을 타고 이리저리 뛰며 가축들의 방향을 인도하고 아낙네들은 텐트와 가재도구를 등에 가득 실은 낙타떼를 몰고 있었다. 말을 타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은 나무상자에 넣어 낙타 등에 단단히 붙들어 매었다. 고양이와 함께 상자 속에 앉아 낙타에 매달려 있는 여자 아이는 이미 이같은 생활에 단련이 돼 있어서 그런지 전혀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이사에 동원된 낙타는 한 마리가 2백여 킬로그램의 짐을 옮긴다. 몽골의 낙타는 혹이 두 개 있는 박트리아 쌍봉낙타이다. 인도나 북아프리카 지역의 낙타에 비해 몸집이 훨씬 더 크고 털이 길어 기품이 당당하다. 매서운 추위도 이겨내는 강인한 박트리아 쌍봉낙타야말로 서부몽골의 유목민들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교통수단이다.

오치사르의 가족은 거대한 돌산 사이에 펼쳐진 초원의 한가운데를 흐르는 개울가를 새로운 야영지로 정했다. 거처가 정해지면 우선 이동식 천막인 게르부터 세운다. 게르는 골조를 이루는 수많은 나무막대기와 이 막대기로 만든 뼈대를 덮는 펠트제의 두터운 천으로 나뉘어진다. 카자흐족의 게르는 다른 몽골인들의 천막에 비해 훨씬 크기고 크고 화려하다. 따라서 구조도 복잡하고 부피와 무게도 훨씬 더 나간다.

가족들은 낙타에서 텐트를 내린 후 남녀노소가 함께 익숙한 솜씨로 집을 만들어 나갔다. 먼저 큰 기둥 두 개를 세우고 나무 막대기를 그물 모양으로 엮어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도록 만든 울타리를 둥글게 친 다음 기둥 위에 올린 원형의 천정과 울타리 사이를 80여 개의 긴 나무로 연결했다. 이렇게 해서 틀이 짜여지면 그 위에 펠트로 만든 덮개를 둘러씌우고 하얀 천을 덮은 후 끈으로 둘러매어 고정시킨다. 하나의 게르가 완성될 때 까지 걸린 시간은 20분 남짓. 게르의 복잡한 구조를 감안하면 놀랄만큼 짧은 시간에 한 가족이 살 집이 완성되는 것이다.

곧이어 난로와 연통이 설치되고 불을 지피는가 싶더니 어느새 물이 펄펄 끓고 수태차가 만들어진다. 수태차는 끓는 물에 우유와 짭짤한 맛을 내는 약초는 넣어 섞은 것으로 몽골인들은 쉬지 않고 이 차를 마신다.

“이같은 이동을 거의 한달에 한번 정도 합니다. 평생을 이런 식으로 살기 때문에 집을 옮기는 것이 전혀 불편하지 않아요.” 시어머니를 도와 음식을 만들던 며느리가 야무지게 말했다.

1년에 10여 차례나 이동을 하므로 짐이 많으면 거추장스럽게 된다. 그래서 이들의 가재도구는 꼭 필요한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난로와 식기 몇 가지, 나무 궤짝 서너 개, 이불과 늘상 입는 옷가지 정도가 전부다. 유목민들은 검소함고 더불어 단촐한 살림살이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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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물처럼 사는 사람들, 썩지 않는 삶

끝없이 펼쳐진 풀밭 위에서 말을 타고 가축을 모는 유목민. 몽골이라는 나라에 대해 사람들이 가장 먼저 연상하는 것은 푸른 초원의 모습이다. 그러나 실제로 몽골은 평평한 초원지대라기보다는 평균 해발 1,500미터가 넘는 산악국가라고 할 만하다. 특히 중국, 러시아, 카자흐스탄 등 3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몽골의 서쪽 끝은 알타이 산맥의 중심부로서, 4,653미터 높이의 타반보그드 산을 비롯, 4,000미터가 넘는 봉우리들이 줄지어 솟아 있는 험준한 지역이다.

바얀울기 아이막-아이막은 우리나라의 도에 해당하는 몽골 행정단위다-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지역은 지리적으로나 지형적으로 몽골에서도 가장 오지중의 오지에 속한다. 이곳은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타르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 찾아가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몽골의 철도는 러시아와 중국을 연결하는 중단선로가 유일하기 때문에 동서로 넓게 퍼진 국토의 서쪽 끝으로 가려면 비포장 자동차 길을 달려 며칠을 가거나 비행기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울란바타르로부터 바얀울기 아이막의 행정중심지인 울기까지는 일주일에 두차례 비행기가 다닌다. 그나마 단번에 가는 항공편은 없다. 수소문 끝에 겨우 찾아낸 비행기는 고물에 가까운 러시아제 프로펠러기였다. 비행기는 도중에 두곳의 경유지를 지났고 그때마다 양고기 푸대를 싣고 내리는 소란으로 인해 기체 밖으로 나와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중부 몽골의 여기저기에는 울창한 숲이 펼쳐진 곳이 많았다. 그러나 서쪽을 향해 가면 갈수록 숲은 점점 적어지고 바위로만 이루어진 산과 구릉이 이어졌다. 아침 일찍 울란바타르를 출발했는데 울기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3시.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울기 공항 청사를 나서자 주변에는 아무것도 눈에 띄는 것이 없다. 한마디로 ‘황량한 서부’였다. 울란바타르와 비교할 때 '천당과 지옥의 차이'라고 하면 너무 심한 것일까.

울기 시내를 벗어나면 헐벗은 바위산 사이로 초원이 펼쳐져 있다. 그러나 초원이라고 해도 우리가 생각하는 부드러운 풀들이 자라나는 초원하고는 거리가 멀다.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면 메마른 땅에나 자라는 가시나무에 가까운 풀들이 대부분이다. 이곳에는 길이 따로 없다. 대강 목적지의 방향을 잡고 다른 자동차의 타이어 자국을 가늠하여 눈짐작으로 길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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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넓은 초원을 품에 안은 유목민의 후예들

중앙 아시아의 깊숙한 오지에 솟아오른 알타이 산맥은 러시아와 몽골, 카자흐스탄, 중국 등 네 나라의 국경이 마주치는 곳에 걸쳐 있다. 때문에 이 나라들은 모두 자기 영토에 알타이라는 이름이 붙은 행정구역을 가지고 있다. 똑같은 지명을 4개 국가에서 동시에 사용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접근하기 어렵고 외부세계에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은 러시아쪽의 고르노알타이 (Gorno-Altai) 자치구. 산을 뜻하는 ‘고르노(Gorno)’ 라는 접두사가 붙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은 3~4천m급 봉우리가 연달아 이어지는 험준한 산악지방이다.

시베리아 남부에 위치한 고르노알타이에는 잊혀진 종족, 사라져 가는 민족인 알타이족이 살고 있다. 러시아 쪽 통계에 따르면 고르노알타이의 알타이어계 주민은 대략 5만 명. 하지만 이중에서 진짜 알타이족은 얼마 되지 않는다.

알타이인은 이곳이 본향인 투르크족, 즉 오늘날 터키 사람들의 직계 조상으로 알려져 있다. 알타이에서 발흥한 기마 유목민족인 투르크는 1천여 년 동안 서쪽으로의 이동을 거쳐 아시아의 초원 지대가 끝나는 유럽과의 경계에 큰 나라를 건설했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 돌궐족으로 기록된 그들의 선조는 고향인 알타이를 지키고 있다가 한없이 축소되어, 이제는 명맥을 유지하기조차 어려운 소수민족 중의 소수민족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나마 현재 남아 있는 알타이족도 러시아인들과의 혼혈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10여 년 전, 고르노알타이 자치구 중에서도 몽골에 가까운 동남부 지방이 알타이 공화국으로 독립하기는 했지만 이미 사라져버린 민족의 정체성을 돌이키기에는 때가 너무 늦었다. 이제 순수한 혈통을 지닌 알타이족 5백여 명만이 알타이 산록의 오지에서 아직도 조상들이 오랫동안 살아온 방식 그대로 유목 이동생활을 하고 있을 뿐이다.


하늘의 뜻을 따르며 살아가는 유목민

시베리아를 관통하는 오브강의 최상류인 아르굿천이 급류를 만들며 흘러내리는 알타이 산맥 북쪽 기슭. 산악지대라면 평지가 없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산과 산 사이에 고원분지가 펼쳐져 드넓은 초원을 이루고 있다. 때문에 지형적으로는 산악이면서도 살고 있는 사람들의 문화와 풍습은 중앙아시아 초원의 유목민 모습 그대로이다.

전형적인 알타이족인 아다로프 씨의 농장에는 6가구가 한데 모여 가축을 기르며 살고 있다. 이들은 여름이면 높은 산지로 올라가 가축을 방목하다가 추운 계절이 돌아오면 저지대의 마을로 내려와 겨울을 보낸다. 주거지를 옮길 때 사용하는 박트리아 쌍봉 낙타는 알타이의 험난한 지형에서 요긴한 교통수단이 된다.

이런 생활방식에 따라 거주지도 겨울철에는 통나무나 판자를 엮어 만든 집에 살지만 다른 계절엔 전통적 이동식 천막인 유르트에서 생활한다. 머리에 흰 눈을 이고 있는 알타이산을 배경으로 푸른 초원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유르트와 양떼는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다.

물론 이들의 생활은 겉보기처럼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여름철에 적당한 비가 내리고 풀들이 알맞게 자라면 기르는 가축들도 살이 찌고 생활이 편하지만 반대로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기도 한다. 겨울철에는 내륙 아시아의 거친 기후에 그대로 노출되어 가축들이 동사하는 경우도 생긴다. 아다로프 씨는 이 모든 것을 하늘의 뜻에 맡기고 산다고 한다.

“사람이나 가축이나 땅의 일부지요. 땅에서 태어나 땅으로 돌아가니까요. 나이가 들수록 가축들이 친구처럼 느껴집니다.”


산과 물의 영(靈)에 대한 각별한 믿음

자연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알타이인들의 정신세계는 아직도 자연숭배와 민간신앙이 지배적이다. 그래서 산을 넘는 고갯마루에는 반드시 돌무더기가 쌓인 ‘오보’ 가 자리잡고 있는데, 산에 사는 정령을 경배하는 곳인 오보는 우리네 성황당과 같은 역할을 한다. 또 알타이인들은 물에 대한 신앙이 각별해서 마을의 주민들은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뒷산의 계곡을 찾아 치성을 드린다. 땅에서 솟아나는 샘물을 ‘아르잔’ 이라 부르며 성스러운 대상으로 섬기는 것이다.

“몸이 아프거나 걱정이 생기면 달이 뜨는 밤에 혼자 와서 아르잔에 몸을 씻는다”는 레냐 할머니는 샘물 근처에서 장난치는 손자들에게 신성한 곳에서는 조용히 해야 한다고 야단을 치며 나뭇가지에 정성스레 흰 천을 매달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그래온 듯 나무에는 수 천 개의 하얀헝겊들이 매달려 있었다.

고원지대의 초원에는 가는 곳마다 고대 투르크족들의 돌무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규모가 큰 것은 지름이 50m 이상씩 되는 것도 있다. 쿠르간이라고 불리는 이 돌무덤은 별다른 건축 기술을 지니고 있지 않았던 초원의 유목민이 남겨놓은 유일한 문화 유산이다. 알타이 산맥 일원에 남아있는 이 같은 유목민 문화를 파지리크라고 하는데 파지리크 문화는 중앙아시아 서부 초원지대에서 알타이로 건너온 기마민족인 스키타이인이 이곳 원주민과 융합되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

'알타이의 얼음 공주’로 불리는 젊은 공주의 미이라는 바로 알타이공화국의 파지리크 쿠르간에서 출토된 세계적 유물이다. 이처럼 미이라가 얼음 속에 꽁꽁 얼어붙은 채로 발굴되는 것을 고고학계에서는 알타이적 현상이라고 부른다. 알타이 산맥 고원지대는 여름철이 매우 짧아 겨울 동안 얼어붙은 땅이 완전히 녹지 않는다. 이런 기후에서 돌로 덮인 쿠르간의 틈새로 빗물이 흘러 들어가 묘실 내부가 얼음으로 가득 차면서 미이라와 부장품을 냉동고처럼 보관하게 된 것이다.

알타이는 투르크어로 '황금'이라는 뜻이다. 스키타이인의 유적에서 출토되는 수많은 황금 유물들이 대부분 이곳에서 캐낸 금으로 만들어졌다고 보는 견해가 있을 정도로 알타이는 금의 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물론 현재의 알타이인들은 황금과는 거리가 멀다. 황금은 커녕 일반적인 생활 필수품까지도 이곳에선 쉽게 소유할 수가 없다. 가장 가까운 대도시라는 러시아의 노보시비리스크조차 자동차로 며칠을 내처 달려야 하는 곳에 떨어져 있다. 그러나 드넓은 초원과 수량이 풍부한 강, 침엽수가 우거진 삼림 등 이들을 넉넉히 품에 안고 있는 알타이의 대자연은 황금보다 더 귀한 재산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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