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llery/Asia'에 해당되는 글 127건

  1. 2008.12.04 둔황 #16 - 양관 (Ying Guan Gate at Dunhuang, Gansu, China)
  2. 2008.12.04 둔황 #15 - 만리장성의 끝, 위먼관 (玉門關, Dunhuang, Gansu Prefecture, China)
  3. 2008.12.04 둔황 #14 - 고대 벽화의 재현 (Reproduction of Ancient Dunhuang Mural) - B. 벽화 모사 작업
  4. 2008.12.04 둔황 #13 - 고대 벽화의 재현 (Reproduction of Ancient Dunhuang Mural) - A. 동굴 벽 만들기
  5. 2008.12.04 둔황 #12 - 동천불동 (East Thousand Buddha Valley at Dunhuang, Gansu Prefecture, China)
  6. 2008.12.04 둔황 #11 - 동천불동 (East Thousand Buddha Valley at Dunhuang, Gansu Prefecture, China)
  7. 2008.12.04 둔황 #10 - 서천불동의 벽화 (Mural at West Thousand Buddha Valley, Dunhuang, Gansu Prefecture, China)
  8. 2008.12.03 둔황 #9 - 서천불동 (West Thousand Buddha Valley at Dunhuang, Gansu Prefecture, China)
  9. 2008.12.03 둔황 #8 - 유림굴 (Yulin Caves at Dunhuang, Gansu Prefecture, China)
  10. 2008.12.03 둔황 #7 - 신 막고굴 (New Mogao Caves at Dunhuang, Gansu Prefecture, China)
  11. 2008.12.03 둔황 #6 - 막고굴 (Mogao Caves at Dunhuang, Gansu Prefecture, China)
  12. 2008.12.03 둔황 #5 - 밍샤산 고분군 (Ancient Tumuli at Dunhuang Desert, Gansu Prefecture, China)
  13. 2008.12.03 둔황 #4 - 밍샤산 낙타 (Camels at Dunhuang Desert, Gansu Prefecture, China)
  14. 2008.12.03 둔황 #3 - 하늘에서 본 밍샤산 사막 (Aerial Shot of Dunhuang Desert, Gansu Prefecture, China)
  15. 2008.12.03 둔황 #2 - 밍샤산 사막 (Dunhuang Desert, Gansu Prefecture, China)
  16. 2008.12.03 둔황 #1 - 밍샤산 월아천 (Crescent Lake at Dunhuang Desert, Gansu Prefecture, China)
  17. 2008.11.21 인도 오릿사주의 원시부족, 본다 (Bonda Tribe of Orissa, India) 1
  18. 2008.11.06 중국 윈난성 나시족 동파 문명 #2 (Dongba Civilization of Naxi Tribe, Yunnan, China)
  19. 2008.11.06 중국 윈난성 나시족 동파 문명 #1 (Dongba Civilization of Naxi Tribe, Yunnan, China)
  20. 2008.10.30 필리핀 피나투보 화산 #3 (Trekking Pinatubo Volcano, Luzon Island, Philippines)

돈황 #16 - 양관 (Ying Guan Gate at Dunhuang, Gansu,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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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황 #15 - 만리장성의 끝, 옥문관(玉門關)
 (Wimungwan Gate, The Western Terminus of The Great Wall, Gansu Prefecture, China)











황에서 고비사막을 지나 북서쪽으로 약 80㎞ 거리에 한나라때 실크로드의 중요한 관문 역할을 했던 옥문관이 있다.
돈황은 인도, 이란과 통하는 중국고대 통로로서 옥문관과 양관은 그 통로의 중요한 열쇠였다.
옥문관을 나와 타클라마칸사막 북쪽길을 따라가면 투르판을 지나 천산산맥으로 이어지는 서역북로를 만나므로, 옛날에는 옥문관을 넘는 것을 출새(出塞)한다 했고, 만리장성 밖을 새외(塞外)라고 했다. 
옥문관은 낮은 언덕에 우뚝 솟은 높이 10m의 정방형 토성이다. 인근에는 한나라 시대의 옛 성벽이 남아 있다.

중국에서 옥의 명산지는 서역 화전으로 임금이 입던 옥의의 옥도 모두 이 화전에서 캐어온 것으로 문헌에 나온다.
서역으로 나서는 관문에 옥문관(玉門關)의 이름을 붙인 것도 옥이 들어오는 문이란 뜻에서 비롯된 것이다.
실크로드는 비단 뿐 아니라 엄청난 옥이 유입되던 '옥의 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둔황 시내에는 옥을 파는 상점들이 많이 남아 실크로드 시대의 영화를 말해주고 있다.

‘타오르는 햇불’ 또는 ‘크게 번성하다’라는 뜻을 가졌다는 돈황은 고대로부터 실크로드를 따라 서역과 교역하던 여행자들이 중국 내에서 마지막으로 쉬어 가는 곳이었다.
돈황 서쪽의 관문인 옥문관이나 양관을 나서면 그 밖은 ‘죽음의 사막’이라는 타클라마칸이다.
사막의 언저리에 외롭게 떨어진 돈황.
수천년간 중국의 변방기지였던 이곳을 쾌적한 주거지로 바꾸려는 사람들의 노력은 지금의 돈황을 사막의 진주로 바꾸어놓았다.
하늘 높이 치솟아오른 포플러와 백양나무 가로수가 거리를 메우고 개울에는 시원한 물이 콸콸 흐른다.
물길을 따라 늘어선 백양나무는 돈황을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작대기 같은 묘목을 꽂아만 두어도 쑥쑥 잘 자라는 백양나무 덕에 명사산 위에서 본 돈황 시가지는 황토빛 도화지에 물감을 풀어 놓은 듯, 푸른색 일색인 현대판 오아시스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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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황 #14 - 고대 벽화의 재현 (Reproduction of Ancient Dunhuang Mural) 

B. 벽화 모사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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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황 #13 - 고대 벽화의 재현 (Reproduction of Ancient Dunhuang Mural)


A. 동굴 벽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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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황 #12 - 동천불동
(East Thousand Buddha Valley at Dunhuang, Gansu Prefecture,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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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 #11 - 동천불동
(East Thousand Buddha Valley, Dunhuang, Gansu Prefecture,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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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황 #10 - 서천불동의 벽화
(Mural at West Thousand Buddha Valley, Dunhuang, Gansu Prefecture,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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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황 #9 - 서천불동 (西千佛洞)
(West Thousand Buddha Valley at Dunhuang, Gansu Prefecture,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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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황 #8 - 유림굴
(Yulin Caves at Dunhuang, Gansu Prefecture, China)



‘돈황은 우리나라 학술 상심의 역사다’
장경동 앞 기념관 마당의 돌에 큼직하게 새겨진 중국학자 첸인커의 글귀다.
뒤늦게 돈황을 찾은 미국 하버드대 탐사대의 경우, 가져갈만한 문서가 남아있지 않자 아예 석굴 벽에 그려진 벽화를 부분적으로 절단하거나 부조상을 떼어가기도 했다.
중국은 열강의 탐사대를 ‘도적’이라고 부르며 약탈해간 돈황 문화재의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반면에 돈황 문화재를 소유한 국가들은 그 보물들을 그대로 두었더라면 청나라 말의 혼란기에 온 사방으로 흩어져 사라져버렸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문화재가 원래의 소유주에게로 돌아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중국 문화대혁명 기간 중 엄청난 문화재가 허공으로 사라진 것을 생각하면 모든 일이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장경동은 왜 폐쇄되었고 그 원인은 무엇일까?
온갖 추측만이 난무할 뿐이지만, 그 중에서도 송나라 시대 서하의 난을 피하기 위함이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한 것으로 여겨진다.
전쟁이 벌어지자 승려들이 중요 문서를 거두어 작은 굴에 보관한 후 흙으로 막아버렸다는 것이다.
돈황 문서는 너무나 양이 방대하여 이를 연구하는 돈황학이라는 학문이 만들어지기도 했으며 원전을 번역하는 작업이 아직도 끝나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월아천이 명사산의 마르지 않는 샘이라면 돈황 문서는 돈황학의 마르지 않는 샘이라고 할 수 있다.
장경동의 문서가 모두 외부로 편취되어 나가고 불상과 벽화도 많이 손상되었지만 그래도 막고굴의 대부분 석굴은 아직까지 아름다운 벽화로 가득 채워져 있다.
벽화의 손상이 날로 심해져서 얼마전부터는 10개의 석굴만 일반 관굉객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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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 #7 - 신 막고굴
(New Mogao Caves at Dunhuang, Gansu Prefecture, China)












왕도사의 보물 발견 소문이 퍼져나가면서 유럽 열강의 탐사대들이 돈황에 모여들었다.
이들은 당시 어지러웠던 청나라의 사정을 틈타 돈황의 보물들을 자국으로 빼내가게 된다.
영국의 스타인은 왕도사를 꾀어 문서 20상자와 그림 5상자를 은화 40닢과 바꾸어 런던으로 보냈다.
뒤를 이어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가 돈황을 찾았다.

스타인이 회화에 몰두했던 것에 비해 프랑스 극동학원 교수였던 펠리오는 한문을 읽을 수 있었으므로 귀중한 내용이 담긴 문서를 많이 확보할 수 있었다.
펠리오는 스타인이 그림을 가져가면서 생긴 비좁은 공간에 쪼그리고 앉은 채 촛불에 의지해 중요한 문서들을 선별해낸 후 약간의 돈으로 문서들을 매입하는데 성공했다.
펠리오가 당시 구입하여 파리로 가져간 문서 가운데 그 유명한 신라승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포함되어 있었다.

혜초가 천축의 다섯나라를 다녀온 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은 원본이 아니고 한 권의 두루마리에 쓰여진 필사본이다.
그나마 책의 앞부분이 떨어져나가고 후반부만 남아 있다.
프랑스에 남아있는 왕오천축국전을 비롯하여 제국주의 탐험대에 의해 빼앗긴 돈황의 보물들은 아직까지 전세계 각지의 박물관에 흩어져 있다.

우리나라의 국립중앙박물관도 우연한 기회에 이중 일부를 소장하게 되었다.
일본의 승려인 오타니가 탐험대를 조직하여 돈황으로부터 일본에 가져갔던 미술품이 일제침략기 당시 조선총독부로 넘어와서 지하창고에 보관되어 있다가 그대로 남게 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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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 #6 - 막고굴
(Mogao Caves at Dunhuang, Gansu Prefecture, China)













명사산이 자연의 수수께끼라면 돈황석굴은 인간이 만든 수수께끼다.
실크로드의 중요한 중개기지였던 돈황에는 불법을 구하기 위해 천축국, 즉 오늘날의 인도를 오간 구법승과 교역품을 싣고 다니던 캐러밴들이 끊임없이 드나들었다.
이리하여 융성하게 된 경제력과 축적된 부는 돈황의 석굴군을 통하여 돈황예술이라는 꽃으로 피어나게 된다.
돈황 석굴군이란 돈황 지역 일대에 산재한 막고굴, 유림굴, 서천불동, 동천불동 등을 포함하여 수많은 석굴들을 총칭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막고굴은 명사산의 남쪽에 위치한다.
서기 4세기부터 무려 천 년이 넘는 기간 동안 헤아릴 수 없는 무명의 민초예술가들이 이곳에 굴을 파고 그림을 그렸다.
천축국을 오가던 구법승을 통해 인도 석굴 예술의 영향을 받은 듯, 돈황의 석굴은 크게 예배굴인 차이티야와 승방굴인 비하라로 나뉜다.
차이티야는 불상을 모시고 벽화로 치장한 후 예배를 하던 굴이며 비하라는 예배굴에 가서 벽화를 그리거나 수도를 하던 승려들이 거주하던 굴이다.
현재 관광객들이 드나드는 막고굴의 오른편에는 아직 공개가 안된 비하라 석굴군이 있다.

500여개에 달하는 막고굴의 많은 동굴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장경동으로 알려진 제17굴이다.
청나라 시대, 막고굴 앞의 절을 관리하던 도교 도사인 왕원록은 16굴에 쌓인 모래를 청소하다 우연하게 17굴을 발견하게 되었다.
17굴은 16굴의 초입에 위치한 꼬마 동굴이다.
가로 세로 각각 3m가 채 안되는 작은 공간에, 벽화도 그려져 있지 않은 이 보잘것 없는 굴이 그토록 유명하게 된 것은 바로 이곳에 가득 보관되어 있던 엄청난 양의 고문서 때문이다.
한문, 산스크리트어, 위구르어, 소그드어, 쿠차어, 호탄어, 티베트어, 몽골어 등 다양한 언어로 쓰인 문서는 도합 4만여 점에 달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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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 #5 - 명사산 고분군
(Ancient Tumuli at Dunhuang Desert, Gansu Prefecture, China)




명사산 정상에 올라 돈황 시가지 방향을 바라볼 때 또 다른 놀라운 점은 사막에 끝간데 없이 펼쳐진 고분군의 장관이다.
중국 동북지방 집안현의 고구려 고분군과 마찬가지로 황무지에 드넓게 펼쳐져 있는 분묘의 수는 수천개를 헤아린다.
둔황 사막의 고분군은 진나라 시대의 것으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넓게 펼쳐 있고 사이사이에 현대의 분묘도 섞여있다는 점이 고구려 고분군과 다르다.
오래된 고분은 세월의 풍화를 겪으며 봉분이 사라지고 야트막한 둔덕처럼 보이기 때문에 아무리 날고 긴다는 도굴꾼이라 할지라도 정확한 정보 없이 왕묘를 찾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도굴꾼이 고고학자들보다 정보의 입수나 기동성 면에서 한발 앞섰다.
고고학자들이 발굴작업을 했을 때 웬만한 분묘는 이미 다 도굴이 된 후였다.
그 중 5호16국 시대의 왕묘는 1986년 도굴꾼의 발굴로 세상에 알려진 후 90년대에 들어서야 일반에 겨우 공개가 되었다.
이 고분은 사막 한가운데 뜷린 계단을 따라 지하의 묘실로 내려가게 되어 있는 구조다. 마치 이집트 ‘왕들의 계곡’에서 볼 수 있는 고분의 분위기를 풍긴다.

비가 내리지 않는 건조한 지방인 덕에 고분 내부의 벽화는 1천년이 넘는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아직까지 선명한 색조를 띄고 있었다.
주작과 현무의 형상을 비롯하여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는 사냥 장면, 세발 달린 까마귀 삼족오 등 고구려 고분에 등장하는 그림과 거의 흡사한 벽화가 수두룩하게 그려져 있었다.
돈황과 고구려의 고분에 그려진 벽화의 동일성은 앞으로 해당 분야 학자들이 연구해야 할 몫으로 남아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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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 #4 - 명사산 낙타
(Camels at Dunhuang Desert, Gansu Prefecture,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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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황 #3  - 하늘에서 본 명사산 사막과 월아천
(Aerial Shot of Dunhuang Desert & Crescent Lake, Gansu Prefecture,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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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 #2 - 명사산 사막 (Dunhuang Desert, Gansu Prefecture,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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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 시내에서 남쪽으로 5킬로 떨어진 명사산은 수백 개의 모래언덕으로 이루어진 사막이다.
보통의 사막과 달리 이곳에는 과연 산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수백미터 높이의 사구가 발달해 있다.
소리낼 명(鳴), 모래 사(沙) 자를 딴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명사산은 ‘모래가 우는 산’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모래가 운다’는 기현상은 이 지역 관광안내원들의 상상력을 한껏 부풀려 안내원이라면 누구든지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엔 산에서 무너져 내리는 모래가 북소리 혹은 천둥같이 커다란 소리를 만들어내며, 가벼운 바람이 불어도 마치 관현악 연주를 하는 듯한 아름다운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얘기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귀로 이 소리를 들었다는 사람은 만나보지 못했다.

모래산에서 소리가 난다는 것이 상상의 산물이면 어떠랴.
해 뜰 무렵, 인적이 끊긴 명사산 위에 올라가 한없이 넓게 펼쳐진 돈황의 평원을 바라보면 천하의 절경을 발 밑에 두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명사산은 고운 모래로만 이루어진 만큼 경사면을 오르기가 녹록지 않다.
밑에서 작은 봉우리를 올려다보면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지만 막상 모래언덕에 붙어보면 고운 모래에 발이 푹푹 빠져들면서 한 걸음 떼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주로 박트리라 쌍봉낙타를 타고 언덕을 올랐다가 모래 썰매를 타고 내려온다.
월아천 쪽의 명사산은 특히 경사가 심한테, 돈황 사람들은 이곳에서 미끄럼을 타면 액운을 면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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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 #1 - 명사산 월아천
(Crescent Lake at Dunhuang Desert, Gansu Prefecture,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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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아래 신이 있어 중국 서역의 황량한 대지를 눈여겨 보아왔다면 혹시 돈황 사막의 비밀을 알려줄 수 있을까.
자연이, 혹은 인간이 만들어낸 풀지 못할 사막의 신비를 얘기해 줄 수 있을까.

오늘날 중국 깐수성 돈황은 자연과 인간이 만든 두 개의 수수께끼를 가지고 수많은 관광객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전설은 말한다. 저 멀리 우뚝 솟은 설산의 눈 녹은 물이 땅속으로 스며들었다가 돈황 교외 명사산의 모래 둔덕 한가운데서 맑은 샘물로 솟아난다는 것을.
그게 아니라면 비가 내리지 않는 메마른 사막 한가운데 떡하니 호수가 생긴 자연의 수수께끼를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다.
실제로 사막에 물이 솟구치는 원인은 기련설산에서 발원한 당하라는 강이 지하로 흘러 비교적 저지대인 이곳에 고이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같은 사전지식을 가지고도 나무 한 그루 없이 모래알갱이로만 이루어진 명사산에 올라 거대한 사구가 만들어낸 분지에 고즈넉하게 자리잡은 월아천을 만나게 되면 그저 신비롭기만 하다.

초승달 모양의 월아천은 150여미터 길이에 폭이 50미터 정도 되는 연못으로, 주변에 작은 오아시스를 거느리고 있다.
가장 깊은 곳의 수심이 2미터 정도인데, 물이 맑아 마치 거울을 보는 듯 하다.
돈황 지역은 황사가 불기 시작하면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모래바람이 몰아친다.
황사 바람은 한 달에도 몇 번씩 일어난다.
그런데도 월아천은 수천년간 모래에 덮인 적이 없었다고 한다.
마치 칼로 도려낸 듯 단아하게 자리잡은 호수가 모래산과 어우러진 풍경은 여행객들의 가슴 속에 평생 잊지 못할 한 폭의 그림으로 각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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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오릿사주의 원시부족, 본다 (Bonda Tribe of Orissa, In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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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중동부 오릿사주의 산악지대에 인도아대륙에서 가장 원시적인 삶을 사는 소수민족 본다족이 살고 있다. 이들의 독특한 풍습과 복장으로 인해 외부인들은 본다족을 별종의 인간으로 보지만 정작 본다족은 스스로를 ‘인간’이란 뜻의 ‘레모’라고 부른다.

본다족의 주거지가 워낙 깊은 숲 속에 자리하고 있어서 이들을 만나기란 쉽지가 않다. 본다의 마을을 방문하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바로 그곳이 오릿사주 산악지대에서 급진적 마오주의 농민무장운동을 펼치는 낙살라이트 게릴라들의 준동 지역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본다족의 본거지인 말칸기리 산림에는 본다 외에도 약 10여개의 소수민족들이 섞여 산다. 그중 본다는 가장 멀리 떨어진 오지에서 작은 촌락을 이루어 살아가고 있다. 그런 이유로 본다족을 만나려면 일주일에 한번씩 이들이 바깥 나들이를 하는 주일 시장을 찾아야 한다.

장이 열리는 날 새벽, 산길이 끝나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려니 동이 틀 무렵에 삼삼오오 산에서 내려와 마을로 향하는 본다족 남녀를 만날 수 있었다. 이들은 장이 열리는 시간에 맞추기 위해 새벽 4시경 산 속의 마을을 출발했다고 한다.

본다 여인들은 산에서 채취해온 말린 나뭇잎을 한자루씩 머리에 이고 있다. 빈디라는 이름의 이 나뭇잎은 시장 주변의 식당에서 접시 대용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10킬로그램 정도의 나뭇잎 한 단을 시장에 내다팔아 버는 돈은 2천원 정도. 이 돈을 벌기 위해 하루종일 산에서 나뭇잎을 채취해 말리고 장날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20킬로의 산길을 걸어온 것이다.

본다족을 특징짓는 것은 그들의 독특한 복장이다. 외부세계와의 접촉이 조금씩 늘어나는 요즘에도 본다족은 반나체의 복장을 고수하고 있다. 여인들은 상반신에 옷을 걸치지 않고 수많은 작은 구슬이 달린 목걸이만으로 가슴을 살짝 가린다. 하체에는 간단한 천 조각을 두르고 가느다란 끈으로 살짝 동여맨다.

오늘날 인도에서 의복을 입지 않은 채 목걸이만을 걸치고 사는 소수민족은 본다족이 유일하다. 또 본다족 여인들은 목에 은합금으로 만든 두꺼운 목굴레를 서너개씩 차고 다닌다. 마치 알루미늄처럼 생겨 가벼워 보이지만 실제 들어보니 하나의 무게만도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이런 무거운 장신구를 밤에 잘 때도 벗지 않고 목에 단 채로 잠을 자는 것이다. 본다족이 인도대륙의 강력한 힌두문화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독특한 풍습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거주지가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오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본다족의 거주지인 말칸기리 산림에서 대규모 보크사이트 광상이 발견되어 개발의 손길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주정부에서는 여기에 광산과 함께 제련공장까지 건설하여 본격적인 알루미늄 생산단지를 만들어나갈 예정이다.

오랜 세월동안 전통적인 생활양식을 버리지 않고 살아온 본다족의 운명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주정부에서는 이들에게 이주비를 주고 저지대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만들어주겠다고 하지만 정작 신정착지에서는 본다족이 마땅히 할 일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이미 대형 포크레인들이 본다족의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숲을 밀어내는 모습이 자주 눈에 뜨인다. 인도에서 가장 장구한 역사를 가진 소수민족 본다는 이제 자신들을 몰아낼 포크레인 소리를 들으며 수천년간 살아온 고향을 떠날 날을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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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후의 상형문자를 사용하는 나시족 동파문화 (Dongba Culture of Naxi Tribe)

나시족은 동파문자라는 고대의 상형문자를 현대에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적으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동파문자는 인류가 사용하는 마지막 상형문자인 셈이다. 이 문자는 동파교의 방대한 경전인 동파경을 기록하기 위해 창안된 것으로, 어떤 학자는 동파문자가 인류의 문자 가운데 가장 역사가 오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나시족은 이 문자를 사용하여 수많은 신화와 전설, 경전을 기록하였다. 동파문으로 기록되어 전해져 내려오는 책은 현재 약 2만권이 남아 있다. 1천여개의 상형문자로 구성된 동파문에 의해 기록된 수많은 두루마리 경전은 나시족의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등 모든 분야를 아우르고 있으며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인식과 이해, 철학을 담고 있다.

나시족의 동파교는 중국 공산혁명 직후부터 지속적인 탄압을 받아왔고 문화대혁명 기간 중에 특히 혹심한 박해를 받아서 승려는 물론 그 문화 자체가 송두리째 사라져버릴 위기에 처하기도 했었다. 동파교의 제천의식도 10년 이상이나 맥이 끊어졌다. 특히 나시족 가정마다 조상의 유물로 보관해 내려오던 길이 1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그림, 신로도(神路圖)는 문혁 기간중 거의 자취가 없어지게 되었다. 나시족은 죽은 후 신로도를 밟으며 이승에서 저승으로 영혼이 떠나간다고 믿어 왔다.

중국이 개방화의 길을 걸으면서 윈난성 리쟝 나시족 자치주에서는 잃어버린 동파 문화를 제대로 되살리자는 움직임이 조심스럽게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이미 관광지로 탈바꿈한 리쟝에서 동파문화와 동파문자는 관광 상품으로 먼저 팔려나가고 있다. 동파 문화가 그 옛날의 찬란한 영광을 다시 살려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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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제(天祭) - 나시족의 제사의식
(Celestial Ceremony of Naxi Tribe, Yunnan, China)

 

나시족은 중국 윈난성 서북부 리쟝을 중심으로, 쓰촨성, 티벳자치구 등에 퍼져 살고 있는 인구 3십여만명의 소수민족이다. 나시족의 중심 도시인 리쟝은 양쯔강의 상류인 진샤강이 도시를 감싸안고 흐르며 인근에는 해발 5,600미터의 만년설산인 옥룡설산이 자리잡고 있다. 리쟝의 구시가는 아름다운 기와집들이 들어차 있고 수백년전의 옛날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나시족은 동파라는 독특한 종교를 신봉한다. 동파는 나시족의 종교이면서 그 종교를 바탕으로 창안된 문명의 이름이기도 하다. 동파교는 티벳 불교의 원류로 알려진 본(Bon)교와 맥이 닿아있는 고대 종교로, 만물에 정령이 있다고 믿는 다신교적 신앙 관념을 그 바탕으로 한다. 나시족에게는 천제를 비롯해 다양한 제사의식이 발달되어 있다. 하늘에 제사지내는 천제와 자연에 깃든 정령을 기리는 자연신 제사는 인간과 자연의 화해를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치러지는 제의라고 할 수 있다.

천제는 1년에 두세번, 특별한 날에 열린다. 이 날이 되면 제사가 열리는 장소에는 양털로 만든 나시족 전통 복장 차림의 주민들이 몰려들어 왁자지껄한 축제의 장을 만든다. 돌로 쌓여진 제단에 향불을 피우고 돼지와 닭을 잡아 피를 뿌리며 앞날의 길흉을 점친다. 또 경전을 불에 태워 하늘로 올리면서 소원을 빌기도 한다. 기원이 끝나면 동파교의 승려들이 동파무라고 불리는 춤을 추며 제천의식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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