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태평양 프리빌로프 제도 (Pribilof Islands, North Pacific Ocean)
Gallery/North America 2008. 8. 3. 23:27 |에코투어, 그 3차원의 희망을 보여준 ‘우리들의 땅’
북반구 최대의 철새 도래지이자 세계 최대의 물개 서식지, 프리빌로프(Pribilofs) 제도. 천혜의 자연조건이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은 섬 주민들이 ‘목숨과 바꿀’만큼 헌신적으로 노력했기 때문이다. 21세기에 만나는 프리빌로프 제도는 개척이 아닌 보존의 의미를 더 잘 알고 있는 이들의 현명한 선택의 결과이다.
북태평양의 한쪽 구석, 알류우샨 열도에서도 북쪽으로 4백여km나 올라간 차가운 얼음 바다에는, 납작한 섬 두 개가 수면 위로 방금 부상한 잠수함처럼 외롭게 떠 있다. 프리빌로프 제도. 변변한 산 하나 없이 평평한 모양을 한 이 섬들은 험하기 짝이 없는 베링해의 거친 날씨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해가 쨍쨍 내리쬐다가 짙은 안개에 가리는가 하면 삽시간에 눈보라가 휘날리기도 한다. ‘한시간 내에 4계절을 모두 경험할 수 있을 정도’라는 섬 주민들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일기변화가 매우 심하다.
희뿌연 안개에 휩싸여 좀처럼 전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 신비의 섬에는 세계 각국으로부터 끊이지 않고 관광객들이 찾아든다. 별로 눈길을 끄는 구석이라곤 없는 그저 나지막한 섬일 뿐인데 왜 이렇게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이곳이 북반구 최대의 철새 도래지이자 세계 최대의 물개 서식지란 것에 있었다.
철새과 물개들의 천국, 프리빌로프
프리빌로프 제도는 사람이 거주하는 세인트폴, 세인트조지 2개의 섬과 무인도로 남아 있는 3개의 암초 등 모두 5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쪽으로 약 60km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 떨어진 세인트폴과 세인트조지 두 섬은 모두 깎아지른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섬을 에워싼 이 해안절벽이 바로 북태평양을 오가는 철새들의 훌륭한 보금자리 구실을 하고 있다. 세인트조지의 해안 절벽에만 대략 한 해 2백만 마리, 2백10여 종의 새들이 둥지를 튼다고 한다.
세인트폴 마을에서 10분쯤 걸어 자그마한 해안절벽 위로 올라섰더니 수천 마리의 바다오리들이 바다와 절벽의 둥지 사이를 분주히 오가며 먹이를 물어오고 있었다. 둥지 속에는 하나같이 예쁜 알들이 보인다. 이곳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띄는 새는 키티웨이크 종류의 바다갈매기와 바다쇠오리들. 다른 곳에선 쉽게 마주칠 수 없는 붉은 얼굴 가마우지도 지천으로 널려 있다. 그밖에도 고니, 신천옹 등 대략 30여 종의 조류가 한꺼번에 시야에 들어온다.
자그마한 섬 한 모퉁이에서 이처럼 많은 종류의 새들을 만날 수 있으니 조류관찰자들이 열광하지 않을 수가 없다. 더구나 사람이 해안절벽으로는 내려설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프리빌로프의 철새들은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르는데 정신이 팔려, 절벽 위로 사람이 가까이 접근해와도 좀처럼 도망가지 않는다.
철새들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단연 퍼핀이다. 눈가에 까만 줄이 그어진 노란 부리의 뿔 퍼핀(Horned Puffin)과 머리에 금색 깃털을 달고 있는 주황색 부리의 금술 퍼핀(Tufted Puffin)은 그 아름답고 고운 자태로 인해 언제나 보는 이들의 사랑을 독차지한다.
프리빌로프 제도는 철새와 함께 북태평양 물개의 천국이기도 하다. 매년 1백만 마리 이상의 물개가 새끼를 낳고 기르기 위해 프리빌로프로 몰려든다. 프리빌로프에 모이는 물개의 수는 캘리포니아 앞 바다와 우리나라 동해 북부 해상을 오가며 회유하는 전 세계 북태평양 물개의 80%에 달한다고 한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장거리 버스가 반드시 한번은 휴게소에서 쉬어가듯 물개들은 캘리포니아와 동해의 정확히 중간지점에 위치한 프리빌로프에서 쉬면서 새끼를 낳아 기르다가 다시 먼 여행을 떠나게 된다.
몽골리안 계통의 해양민족 알류트족
18세기에 물개 모피는 황금과도 같은 환금성이 있었다. 최고급 의류는 모두 물개 모피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1786년, 태평양을 회유하는 물개의 새로운 서식처를 찾아내기 위해 북태평양 탐험에 나선 러시아 항해가 게라심 프리빌로프(Gerassim Pribilof)가 이 섬을 발견하고 해안에 닻을 내렸을 때 선원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고 한다. 수백만 마리의 물개가 가득 들어찬 긴 해안선은 어마어마한 장관이었으리라.
당시 프리빌로프 제도는 무인도였다. 러시아인들은 즉시 알류우샨 열도에 흩어져 살던 몽골리안 계통의 해양민족인 알류트족을 이주시켜 물개를 사냥하고 처리하는 작업을 시켰다. 이때 이주한 수백 명의 알류트족이 오늘날 프리빌로프 주민의 조상들이다.
1867년 알래스카가 미국 영토로 뒤바뀌면서 프리빌로프 제도도 미국땅이 된다. 미국이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사들이게 된 배경에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활발한 물개 가죽 생산지이던 프리빌로프 섬을 차지하려는 이유가 가장 컸다.
20세기에 들어 무분별한 도살로 물개의 수가 줄어들자 미국 정부는 해양 수산국을 통해 연간 물개 포획 숫자를 3만 마리씩으로 제한하고, 그 이익금의 2/3를 프리빌로프의 교육과 교통, 통신 시설에 투자해왔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면서 모피 의류의 가치가 떨어지고 동물 보호론자들의 항의가 점차 드세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1983년 연방정부는 물개 포획에서 물러났고, 식용을 제외한 알류트족의 물개 도살행위도 전면 중지시켰다. 따라서 이곳 주민들의 생계를 이어주던 물개가죽 처리공장도 폐쇄되었다.
“물개는 기를 쓰고 보호하면서 멸종 위기에 처한 알류트 족의 처지는 아랑곳하지 않으니 모순이지요. 지금까지도 미국 정부의 정책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어요.”
세인트폴 섬에 사는 수잔 메르콜리에프는 20여 년 전 갑작스럽게, 살아갈 방편을 잃었던 얘기를 꺼내며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가 가진 자연을 보여주자”
1983년 해양포유류 국제조약을 앞두고 시행된 미국 정부의 물개 포획 중지 조치로 당장 일거리를 빼앗긴 프리빌로프 주민들은 난감했다. 농작물 재배가 불가능한 섬에서 물개를 잡지 못하게 하니 달리 먹고 살 길이 없었다. 프리빌로프 제도 주변은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황금 어장이라지만 섬에는 제대로 된 선착장 하나 없고 어선이라곤 보트 크기의 소형 고기잡이 배 2대가 전부였다. 섬사람들은 머리를 맞대고 궁리를 했다. 그리고선 생각해낸 것이 바로 에코투어였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연환경을 외부사람들에게 보여주자. 그것을 상품으로 관광객을 끌어모으자.”
이때부터 주민들의 생각이 실행에 옮겨졌다. 들에 사는 종달새 한 마리, 길가에 피어나는 수선화 한 송이가 관광객을 불러모으는 자원이라고 생각한 주민들은 애지중지 환경을 지켜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에코투어에 대한 아이디어를 객관적으로 실행시키기 위해 ‘타나드구식스 코퍼레이션(TDX)’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타나드구식스(Tanadgusix)란 ‘우리들의 땅’이란 뜻의 알류트 말. ‘우리 땅을 가지고 우리가 먹고 살겠다’는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알류트족끼리만 운영하는 프리빌로프 섬의 영리단체인 TDX의 노력으로 나날이 줄어들기만 하던 물개의 숫자가 예전처럼 다시 늘어났고, 이들이 나서서 철저히 사냥을 통제한 덕에 섬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는 순록 떼의 모습이 관찰되기 시작했다. 철새 산란기에 알을 가져다 식량으로 삼던 주민들의 행위도 중지되었다. 이에 따라 더욱 많은 철새들이 프리빌로프를 찾기 시작했다. 이제는 마을을 걷다 보면 이집 저집 사이로 얼굴을 내미는 귀여운 북극여우와 자주 마주치기도 한다.
‘프리빌로프가 조류관찰지로는 더할 나위없이 적당한 곳’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많은 조류애호가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로 섬을 찾아왔다. 물론 섬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에코투어는 TDX가 관장한다. 섬의 환경이 다시 살아났다지만 작은 섬의 에코시스템을 그대로 관광객들에게 개방하면 금세 교란이 일어난다.
그래서 외부로부터 온 관광객들은 TDX의 통제에 따라 언제나 단체로 움직이며 정해진 코스를 따라 이동하게 된다. 사진 촬영 등을 위해서 개인 행동을 해야 할 경우에는 따로 TDX의 환경감시관으로부터 교육을 받은 후 환경보호 서약서에 서명을 하고 개별 허가증을 발급받아야 한다.
세인트폴 주민들은 섬 전역에 14군데의 물개 관찰지를 만들어 지극정성으로 보호하고 있다. 관광객들은 널빤지로 만든 울타리 뒤편에서 나무 틈 사이로 물개를 관찰하므로 물개에게 전혀 방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TDX에서 고용한 아르바이트 학생들이 2명이 1조가 되어 돌아가면서 망을 보고 있었다.
프리빌로프 제도를 여행하는 경비는 당연히 비싸다. TDX가 모든 교통과 숙박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한적인 교통편과 숙박 시설 때문에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패키지 여행에 만족해야 한다. 그러나 가격에 대해 불평하는 관광객은 없다. 그만큼 프리빌로프에 온 관광객들은 비싼 비용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받고 돌아가기 때문이다. 환경을 재산으로 살아가는 프리빌로프 제도 사람들은 말한다.
“우리가 목숨과 바꾸며 지켜온 환경인데 이를 보러 오는 백인들에게 비싼 값을 받는 것은 당연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