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향지로(麝香之路) 제작노트



               박 종 우 (인디비전, gangdo@gmail.com)


수년전 중국과 우리나라의 신문에 아래와 같은 기사가 게재되었다. 중국 신화통신을 전재한 기사였다.


  최근 고고학적 조사에 의해 서부 티벳의 응가리를 중심으로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연결하던 사향지로가 발견되었다. 샨시성 고고문물연구소의 장지엔린 박사는 이 길이 고대의 상업도로일뿐만 아니라 동서양의 문화, 종교, 외교, 군사 교류의 중요한 통로라고 주장하였다.

  로마제국은 서기1세기 때부터 참도-라사-응가리-서아시아를 통하여 티벳에서 많이 생산되는 사향을 교환했다. 그래서 이 길은 사향지로라고 불린다. 장지엔린 박사에 의하면 고고학자들이 응가리에서 발견한 각종 석기 중에는 동아시아, 남아시아, 북아프리카와 유럽 원시문화의 전형적인 석기형태가 있었는데 이는 이 길이 구석기,신석기 시대 때부터 이미 존재해 왔다는 것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응가리의 북부를 탐사한 고고학자들은 3-4천년 전의 암각화에서 중앙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사는 낙타와 타조의 그림도 발견하였다 .연구에 따르면 사향지로가 융성했던 시기는 10세기 중엽부터 17세기 초까지의 코카왕국 때였다.

고고학적 발견에 의하면 동서양 사이의 종교와 문화도 사향지로를 통하여 교류되었다. 코카의 사원과 동굴에서 발견된 벽화에는 목재, 옷감과 기타 물건을  교역하는 풍경이 묘사되어 있으며 굴 안에는 지금까지도 당시의 마른 살구와 살구씨가 쌓여 있다.  코카의 왕은 여러 차례에 걸쳐 인도에 사신을 파견하여 불교를 학습시켰고 한 동굴에서는 포르투갈어로 쓰여진 성경의 훼손된  페이지를 발견하기도 했다.



20여년전 히말라야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부터 나의 눈길을 끈 것은 산길을 오가는 캐러밴의 모습이었다. 길을 걷다 보면 주민도 만나고 등반객도 마주치지만 무엇보다도 말이며 야크에 물건을 잔뜩 싣고 어디론가 향하는 캐러밴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특히 안나푸르나 봉이 솟아있는 네팔의 칼리간다키 계곡에 가면 수백 마리의 노새들이 물건을 싣고 줄을 이어 산길을 오르내리는 광경을 수시로 만나게 된다. 자동차가 닿는 도로에서부터 무스탕 지역까지의 멀고 먼 산길은 현지인들이 ‘동키 트레인’이라고 부르는 노새 캐러밴에 의해 닦여진 길이다. 나는 엄청난 양의 여러 가지 물건들이 쉴 새 없이 오가는 이 길을 다니면서 산악지역 사람들이 벌이는 교역의 활기에 놀라곤 했다. 칼리간타키 무역에 종사하던 안나푸르나 마낭 마을 사람들은 히말라야 무역에서 터득한 장사 수완을 바탕으로 수십년 전부터 홍콩과 싱가포르 등지로 진출했고 엄청난 거부로 성장한 사람도 많다. 히말라야를 오가면서 나는 언젠가 그곳의 민초들이 벌이는 물물교역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1997년 가을, 나는 네팔 서부의 돌포 지역에 갔다가 그 유명한 소금 캐러밴을 만났다. 돌포의 살당과 비제르가온이란 두 마을은 여름철에 산 너머 티벳 푸랑 지역에 있는 캬토 총라, 마윰 총라 등의 시장으로 가서 티벳 응가리 지역의 염호에서 가져온 소금을 구입한다. 그리고 11월이 되면 산맥을 넘어 네팔의 힌두교도들에게 소금을 야크로 운반해주는 일을 해왔다. 1997년은 히말라야 설역 문화권의 교역사에서 큰 전환점이 된 해이다. 그해 히말라야 북쪽 너머에 있는 티벳의 소금호수에서는 행정명령에 의해 유목민들의 소금 채취가 금지된다. 전통적으로 티벳의 응가리에서 히말라야 산록까지 소금을 나르던 팔라 유목민들은 소금 채취를 못하게 되고 염호의 출입마저 금지되었다. 그때부터 염호 주변에 사는 주민들이 직접 소금을 채취해서 트럭으로 국경시장까지 운반하기 시작했다. 소금호수까지 도로가 뚫렸고 유목민들의 캐러밴은 더 이상 존재가치가 없어졌다.


히말라야 남쪽의 돌포 지역에서도 같은 해 수백년간 이어져온 소금 캐러밴에 일대 전환이 일어난다. 프랑스 다큐멘터리 사진가인 에릭 발리가 내셔널지오그래픽 잡지에 네팔의 소금 캐러밴을 소개하면서 내가 돌포에 가 있던 바로 그 무렵에 프랑스 영화팀을 데려다 사전답사를 하고 상업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소금과 곡식을 부피에 따라 1:1로 바꾸는 물물교환으로 살아가던 현지 주민들은 일당을 받고 영화 촬영에 고용됐고 자신들의 소금캐러밴이 돈을 받고 남에게 보여줄 수 있는 상품이 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게 된다. 그 후 인도양의 값싼 소금이 네팔의 산악지역까지 들어오면서 더 이상 티벳의 소금이 필요 없게 되었지만 이들은 세계각지에서 찾아오는 사진가나 영화제작자들을 위해 전통적으로 소금을 나르는 방식을 겨우 유지하면서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다.


돌포의 험한 고개인 카그마라 라에서 처음으로 소금캐러밴을 만났을 때 나는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었다. 당시 가족으로 이뤄진 캐러밴 가운데 며느리가 고개를 넘기 직전 출산을 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아침이면 태어난지 보름밖에 안된 그 작은 아기를 중국제 비료 푸대에 집어넣고 야크 등에 얹어 노끈으로 칭칭 동여맨 후 야크를 출발시킨다. 그러면 아이를 태운 야크는 하루 종일 소금을 나르는 다른 무리들과 산길을 걷다가 저녁 무렵에야 캠프에 도착하는데 그때서야 엄마는 울다 울다 지친 아이를 꺼내 비로소 젖을 물리는 것이다. 그 모습은 그동안 보아왔던 전체 히말라야 문화권의 수많은 장면 가운데 가장 깊숙하게 나의 뇌리에 파고들었던 이미지였다. 그 아기가 이제는 어엿한 소년이 됐을 터. 나는 아이가 어떻게 자라났는지 궁금했고 그 아이를 다시 찾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어 카트만두에 갈 때마다 돌포의 캐러밴들을 만나 태어난 후 보름 지났을 때 촬영한 아이와 엄마의 사진을 가지고 수소문을 했다.


소금 캐러밴을 마친 돌포 사람들은 12월이면 네팔 수도 카트만두의 티벳 사원인 보드나트에 모여 겨울을 보내곤 한다. 보드나트 사원 근처에 프랑스 영화 <캐러밴>의 주인공 역을 맡으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돌포 캐러밴 출신의 티렌 론둡이 사는 집이 있다. 그는 영화가 세계적인 히트를 친 후 일년의 절반은 카트만두에 와서 지낸다. 나는 카트만두에 가면 언제나 티렌의 집에 들러 제대로 된 캐러밴을 함께 촬영해보려 얘기하곤 했지만 서로 시간이 맞지 않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틈틈이 이어지던 히말라야 교역루트의 취재는 2003년부터 본격적인 물살을 타기 시작한다. 그해 봄, 나는 산악인 엄홍길의 등반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 가 있었다. 히말라야 8000미터 14봉 완등에 성공한 엄홍길은 북쪽 티벳에서 에베레스트에 오른 후 남쪽 네팔로 내려오는 역사상 최초의 히말라야 종단 등반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엄홍길은 ‘너무 많은 눈이 쌓여 있어 네팔쪽 하산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무전을 보내고 티벳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최초의 에베레스트 종단 등반은 그렇게 실패로 돌아갔다. 티벳에서 네팔까지 히말라야를 종단하여 넘는 것은 문화교류사 측면에서도 매우 의미가 있는 일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네팔의 쿰부 히말라야에 거주하는 셰르파족은 ‘동쪽에서 온 사람들’이란 뜻으로, 원래 티벳 동부의 캄 지방에서 서쪽으로 난 무역로를 따라 움직이던 캄파 출신이다. 차마고도 무역로의 주인공인 캄파는 길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다가 그중 일부가 에베레스트 옆의 히말라야 고개를 넘어 오늘날 네팔의 남체바자르 마을을 만들게 된 것이다.


엄홍길이 티벳 쪽으로 돌아내려간 그날 오후, 할 일이 없어진 나는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앞에 솟아 있는 칼라파타르 봉에 올랐다. 에베레스트를 가장 아름답게 조망할 수 있는 이 봉우리는 또한 티벳과 네팔을 이어주던 옛 교역로인 로라 라는 고개가 마주 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로라는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6천미터가 넘는 고개였으나 오래전에 일어난 대형 눈사태로 사람의 통행이 불가능해져 더 이상 고개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인적이 없는 칼라파타르 봉 꼭대기에서 촬영을 하던 나는 뜻하지 않게 세계적인 등반가 라인홀트 메스너를 만나게 되었다. 우연히도 1988년 같은 장소인 쿰부 히말라야에서 트레킹 중 그를 만났던 적이 있다. 세찬 바람을 맞으며 바위 위에 앉아 얘기를 나누던 중 그가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면 낭파라를 다뤄보면 어떻겠느냐’는 말을 꺼냈다. 낭파라. 해발 5,800미터의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고개. 길고 긴 히말라야 산맥을 따라 나 있는 많은 고개 중 진정한 교역이 이루어지는 마지막으로 남은 고개가 바로 낭파라이다. 오래전부터 낭파라에 대한 관심은 많았으나 말썽 많고 탈도 많은 티벳 국경에 걸쳐 있어 감히 접근을 생각해보지 않은 곳이었다. 낭파라는 세계 제6위봉인 초오유 중턱을 끼고 티벳과 네팔을 연결하는 험난한 고개이다. 라인홀트 메스너는 초오유 등반 중 낭파라에 관심을 갖게 되어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고개를 넘었고 낭파라에 관한 책까지 출판했다고 했다.


2004년부터 중국 쪽에서 차마고도를 취재하느라 여념이 없어서 네팔에는 자주 들를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2005년 차마고도의 서쪽 루트를 취재하며 티벳에 들어가게 되어 낭파라의 길목인 팅그리 마을을 자주 지나다니게 되자 낭파라를 넘어보고 싶은 열망이 살아났다. 중국 윈난성에서 티벳 라사까지 이어지는 차마고도를 2006년 여름까지 촬영한 다음 나는 곧장 서부 티벳을 지나 히말라야를 넘는 교역루트를 취재하기 시작했다.


2007년 봄 SBS에서 ‘차마고도 1000일의 기록, 캄’ 2부작을 방영한 직후 ‘히말라야의 의사’ 임현담 님이 <사향지로>의 다큐멘터리를 만들면 어떻겠느냐고 얘기를 꺼냈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에 담고 있던 제목이라 즉각 사향지로라는 이름을 걸기로 했다. 마침 ‘히말라야의 화가’ 다정 김규현 선생이 사향지로에 많은 관심을 가져온 사실도 알게 됐다. 카트만두에서 살다가 경기도 포천에 들어와 있는 시인 고철 김홍성 형의 집에서 임현담 님을 만나 작전회의(?)를 하고 그동안 촬영해두었던 자료를 정리하는 한편 바로 카일라스부터 시작해 수틀레지 강을 따라 인도로 넘어가는 사향지로의 메인루트 촬영에 돌입했다.


원래 사향지로(Musk Road)라는 이름은 중국의 고고학자들만 사용해오던 명칭인데 중국사회과학원의 연구원이던 샹샤칭 박사가 하버드대 옌칭연구소에 연구교수로 가서 발표한 논문에 등장하면서 서방세계에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다.


2007년의 촬영은 순조롭지가 않았다. 4월에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서 5명의 중국계 미국인이 현수막을 걸고 티벳 독립을 외치다 연행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당국은 전체 티벳 국경지역에 외국인 출입금지령을 내렸다. 티벳의 국경지대에 들어가려면 내외국인을 막론하고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그 가운데 인민해방군사령부에서 발행하는 외국인 통행허가서의 발행이 완전 중단되었다. 성공적인 올림픽 개최에 명운을 걸고 있는 중국은 국경지대를 아예 폐쇄함으로써 혹시 있을 수도 있는 티벳 독립운동을 원천적으로 봉쇄시키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여름철에는 티벳 푸랑과 네팔 돌포를 잇는 국경교역로의 통행이 사전예고 없이 금지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티벳의 캬토총라에서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 줄줄이 산을 넘던 돌포의 캐러밴들은 영문도 모르고 국경에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7월에 북인도 가르왈 히말라야 지방에서 촬영 중 몬순에 발목이 잡혀 촬영 일정이 늦어진 나는 최소 4주가 걸리는 네팔-티벳간 캐러밴 취재에 동행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네팔의 동료 카메라맨을 돌포로 보냈었는데 4주 후에 팀과 합류하려고 티벳으로 들어갔다가 그가 국경을 못 넘고 되돌아간 사실을 알고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국경의 폐쇄는 올림픽이 끝날 때까지 이어진다는 거였다. 역사상 처음으로 카메라를 가지고 히말라야를 직접 넘어 티벳의 시장까지 취재하기 위해 그동안 티벳 쪽의 알고 있는 모든 인맥을 동원하여 공을 들였었는데 한순간에 물거품이 된 것이다. 다큐멘터리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 관한 취재가 실패하여 11월초에 프로그램을 방영하려던 계획도 수개월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취재를 끝냈지만 ‘최초로 낭파라 촬영 성공’이라는 뜻밖의 수확도 거둘 수 있었다. 국경 부근 통행이 철저히 금지된 상황에서 인민해방군 국경수비대의 좋은 사람을 만나 그토록 원하던 낭파라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한국이라는 나라를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에게 국경 출입을 허가해준 그 장교는 새로운 임지를 발령 받아 다음 달이면 다른 곳으로 가게 되는데, 그가 떠난 후 앞으로 외국인이 낭파라에 다시 갈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을 것이다.


히말라야의 교역로를 취재하면서 나는 그 거대한 산을 품에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끈질긴 생명력에 대해 새로운 경외심을 가지고 바라보게 됐다. 사람이 사는 곳엔 길이 있고 길이 있는 곳에선 언제나 교역이 이루어졌다.

히말라야를 넘은 나의 취재루트는 이제 산맥의 남쪽을 향하게 된다. 오랫동안 외국인의 출입이 통제된 북인도의 킨나우르, 스피티, 라하울 지방과 라다크의 룹슈, 누브라, 잔스카르 지방, 캐시미르와 파키스탄의 발티스탄 지방이 그 무대다. 길이 이어지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 길을 따라갈 것이다. 사라져가는 히말라야 사람들의 한 시대를 기억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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