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리 행 야간열차 (Night Train to Puri, Oris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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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오 10시 정각, 캘커타 하우라 (Howrah) 중앙역. 밤 11시45분 출발 예정인 푸리 행 야간 열차, Puri Express가 보무도 당당하게 22번 플랫폼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정시 출발예정임을 애써 자랑하는듯한 목소리의 방송이 쩌렁쩌렁 역 구내에 울려퍼진다.
'햐. 인도 참 많이 발전했네. 기차가 정시에 출발을 다 하고...’
최근 브릭스다 뭐다 해서 인도의 경제 발전을 칭송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더니 이렇게 눈에 띄는 성과가 나타나는구나. 이제는 열차 자리 잡는 일만 남았다.
내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은 표가 아닌 RAC 예약권, 열차가 만석이라 그나마 어렵게 구한 것이다. RAC(Reservation Against Cancellation)란 말하자면 ‘현재는 만석이지만 누군가가 예약을 취소하면 너에게 우선적으로 자리를 주겠다’는 철도청의 약속이다. 이같은 약속이 얼마나 헌신짝처럼 버려지는가는 그간의 인도 여행 경험을 통해 익히 숙지하고 있으므로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무슨 수를 쓰기 전에 열차 차장으로부터 재빨리 좌석을 확보해야만 한다.
“발목이 삐어 서 있을 수가 없어요. 엉덩이에 종기가 나서 앉아있을 수도 없구요...”
“얼마전 맹장수술을 했는데 의사선생님이 장거리 열차 탈 일 있으면 반드시 누워 가야 한다고 했어요. 아니면 재수술을 받을 수도 있다면서....”
여러 가지 거짓말을 만들어서 예행 연습을 한 다음 비장한 얼굴 표정을 짓고서 RAC 종이를 차장에게 내밀며 눈치를 살폈다.
“오늘 다행스럽게도 예약 취소가 많아 자동적으로 침대칸이 배정되었습니다...”
에구 싱거워라. 툭하면 거짓말 할 궁리나 해대는 습관을 하루 빨리 버려야 할 텐데....
2등석 에어컨 침대차에 그럴듯한 자리를 잡았다. 차장이 외국인이라고 깨끗한 시트를 가져다주고 고맙게도 이것저것 신경을 써준다. 장마철이라 남들은 건조가 덜 되어 눅눅한 시트를 받아들고 투덜거리는데 (그런데 자세히 보면 별로 투덜거리는 사람은 없다) 뽀송뽀송한 새 시트를 받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여러모로 감사합니다. 푸리까지는 얼마나 걸리나요?”
“500킬로가 넘습니다”
거리에는 관심이 없다. 어차피 침대칸에 누워 뒹구는 동안 기차는 열심히 달릴 테니까
“그게 아니고 푸리에 내일 새벽 몇 시에 도착하지요?”
“걸리는 시간은 모릅니다. 지금 예정으론 내일 저녁 9시 도착인데, 더 늦을 수도 있어요...”
“뭐라고욧?(이라고는 말하지 않았고 What!!이라고 했다) 500킬로 가는데 꼬박 하루가 걸린다고?”
“평소 루트와는 다른 경로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서울에서 안동 가는데 전라도 나주로 돌아간다는 얘기다. 정시 출발이라고 좋아했더니 이번엔 도착시각이 고무줄이로구나.
‘그러면 그렇지. 인도 기차가 별 수 있나’ 아까의 감동은 사라지고 못된 생각이 슬며시 고개를 쳐든다.
캘커타에서 푸리로 출장 간다는 옆자리 신사가 보충 설명을 해주었다.
“오늘 지방에서 캘커타에 도착하는 기차가 하나도 제시간에 들어온게 없습니다. 이 기차는 마침 캘커타에 묶여있었기 때문에 정시 출발이 가능했던 거지요. 모든 것이 몬순 때문입니다”
몬순으로 인해 온 사방에 홍수가 나고 철길이 끊어져 기차들이 요리조리 철길 끊어진 곳을 피해 다닌다는 것이다.
여름철 인도를 여행하다보면 언제나 듣게 되는 말“몬순 때문입니다”
‘몬순 때문이라. 천재지변인데 어쩌겠는가?’
이번 여행에서도 얼마나 자주 이 소리를 듣게 될지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
열차 출발하고 열두시간 동안이나 늘어지게 자다가 일어났더니 배는 고픈데 먹을게 없다. 당연히 먹을 것을 파는 사람도 다니지 않는다. 옆자리 신사가 부시럭 부시럭 신문지를 펼쳐 뭔가를 꺼내 드시는데 먹어보라는 소리가 없네. 에구 꼬르륵
노트북을 꺼내서 일기를 쓰기로 했다. 여행하며 생전 안 쓰던 일기를 쓰는 것도 다 몬순 덕분이다. 한참 자판을 두드리다보니 우리의 푸리 급행, Express란 표기가 선명한 이 열차는 그 이름이 무색하게도 어딘가에 또 정차를 하더니 움직일 줄을 모른다.
창 밖에 비가 뿌리기 시작했다. 몬순의 무거운 구름이 지평선을 가렸다.
열차 가는 길 앞쪽에서 갑자기 철로가 끊어지면 그 다음엔 어쩌지? ’
방정맞은 생각일랑 집어치우고 다시 잠이나 자자. 24시간 내로 푸리에 도착하길 기도하면서...


Ⓒ Park Jongwoo / O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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